승리인 듯 승리 아닌 승리

이창근 | 쌍용차 해고자

작년에 영화 <카트> 촬영장엘 갔었다. 보조 출연으로 투쟁 사업장 노동자들의 출연이 있었기 때문인데, 촬영신 배경은 11월. 그런데 12월에 촬영을 하다보니 출연자들의 옷이 문제였다. 온통 점퍼 차림이라 계절과 맞지 않다는 얘기였다. 추운 날씨에 겉옷을 벗었다 입었다를 반복했다. 늦은 저녁 시작된 촬영이 새벽까지 이어졌다. 대형마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다룬 이 영화는 곧 개봉된다. 11월에 어울리는 옷이 있겠지만 소위 거리에서 투쟁하는 사람들은 두꺼운 옷을 가장 빨리 입고 가장 늦게 벗는다. 계절을 앞서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두 해도 아니니 계절과 무관하게 날씨 따라 산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게다. 그러니 영화에서 다소 두꺼운 옷을 입고 있는 이들이 있다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다. 오히려 그것이 일상의 리얼리티가 아닐까. 가을이라지만 벌써 겨울 문턱이다. 짧은 봄만큼이나 가을도 짧다. 반팔 티셔츠는 옷장 속에 들어가고 점퍼들이 하나둘 옷걸이 앞쪽에 걸린다. 겨울을 꿈꾸는 계절이라며 낭만적으로 말하기엔 현실은 사납기만 하다.

[세상읽기]승리인 듯 승리 아닌 승리

승리의 즐거움도 만끽할 새 없이 두꺼운 옷을 꺼내 입는 이들이 있다.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지난 18일 933명 그리고 19일 246명이 정규직 지위를 법원으로부터 인정받은 이들이다. 샴페인이 있을 자리에 쓴 소주가 놓였다. 짧은 승리 후 긴 기다림을 알고 있는 것일까. 10년 만의 승리지만 즐거움이 없어보인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현대차 정규직 근로자 지위를 확인받았지만 이제 겨우 1심이다. 현대차가 법망을 피해 보려 3년11개월을 끌어오던 재판이다. 대형 로펌을 동원한 법적 다툼을 했지만 법리적으로 진 싸움이다. 그러나 현대차는 또다시 항소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항소를 접고 정규직으로 채용하란 것이 현대차의 결단의 몫인가. 기업의 사회적 책무란 점에서 사회적 지탄의 목소리를 현대차가 이제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우선 확인해야 한다. 현대차가 그동안 벌여온 법치 능멸의 시간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차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법원의 판결을 존중해 즉각적인 정규직 채용의 길을 열어야 한다.

지난 18일 현대차는 한전 본사 부지를 10조5500억원에 낙찰받았다. 감정평가액보다 세 배 넘게 베팅한 것이다. 이를 두고 투자이익보다 개발이익이 못 미칠 것이기 때문에 승자의 저주가 따를 것이란 얘기가 한창이다. 현대차가 삼성동 한전 본사 부지 매입을 통해 한국판 ‘아우토슈타트’를 꿈꾸고 설계하겠다는 것을 뭐라 탓할 마음은 없다. 그러나 11조원에 육박하는 베팅금액이 누구의 돈인가는 따져야 할 문제다. 현대차는 비정규직 노동자 탄압의 살아있는 역사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쥐어짠 결과 오늘의 현대차를 구성하고 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따라서 현대차가 지금 우선 해야 할 일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밀린 빚 청산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 그야말로 생때같은 빚 청산이다. 그러나 현대차는 아무런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오히려 신규채용으로 상황을 눙치려 들고 있다.

지난해 11월 쌍용차 비정규직 노동자 4명도 정규직 판결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2심재판에 끌려다닐 뿐 신분의 어떤 변화도 없다. 또한 삼성전자서비스 사내하청업체 노동자 1500여명이 사측을 상대로 낸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을 비롯해 기아차, 현대하이스코, 한국지엠도 심리가 진행 중이다.

“근로자의 3분의 1에 달하는 비정규직의 처우 개선이 이뤄지지 않고는 민생회복이 어렵다.” 이 말은 박근혜 정부 최경환 기획재정부 장관의 취임 일성이다. 민생 회복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정답은 이미 나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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