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걸 저희가 못 믿어요’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난방이 끊긴 기숙사에서 농촌 이주노동자가 사망했다. 기숙사는 비닐하우스였다. 지난여름엔 폭우에 이주노동자가 숙소로 사용하는 비닐하우스가 잠겼다는 보도가 나왔다. 지겹게 봤던 활자들이 반복해서 찍힌다. “한파경보에 난방 고장 ‘비닐하우스 숙소서 이주노동자 숨져’ ”. 새삼스러울 것도, 놀랄 것도 없는 뉴스다. ‘비닐하우스는 집이 아니다’, ‘이주노동자도 사람이다’. 당연한 문구들이 산발적으로 울린다. 감정은 메마르고 그 자리에 차가운 냉소만 남는다.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그러다 인터넷에 떠도는 희생자의 사진을 봤다. 똑같지도, 흔하지도 않은 고유한 인간의 얼굴이었다. 깜짝 놀라 화면을 내려버렸다. 그의 얼굴을 너무 또렷이 봤다가 너무 쉽게 잊을까 두려웠다. 값싼 연민과 동정의 눈길로 너무 쉽게 그의 얼굴을 보는 건 아닌지 부끄러웠다. 그러곤 얼굴도 모르는 농장주를 욕하면서 죄책감을 덜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주노동자의 자리에 건설노동자, 택배노동자, 배달노동자가 와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일터에서 매일 6명씩 살해되고 있는데도 세상은 잘도 돌아간다. 집은 지어지고 인터넷 쇼핑과 배달은 계속된다. 일하다 죽는 것이 밥 먹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반복적인 일상이 됐다. 끔찍한 세상을 멈출 수 없었던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삶을 멈췄다. 일하다 죽는 게 별일이 아닌 세상에서 도저히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제정하라며 곡기를 끊었다. 기업에 자식과 동생, 가족을 잃은 이들이다.

이를 불쌍히 여긴 김태년 원내대표가 24일 국회 농성장을 찾아 단식을 풀어 달라고 했다. 그러나 고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씨는 불쌍한 유족이 아니라 한 사람의 노동운동가였다. 그가 권력자에게 날린 일갈이 화제가 됐다. “여태까지 여당 혼자 많은 법을 다 통과시켰잖아요. 그런데 왜 이 법은 꼭 야당이 있어야 돼요?” 주목해야 할 말이 더 있다. 김미숙씨는 “법안이 논의만 되고 무산된 게 많잖아요”라고 추궁했고, 김태년 원내대표는 무산될 일 없다고 자신했다.

“그걸 저희가 못 믿어요.” 그와 동료들이 왜 국회의원들에게 맡기지 않고 단식을 하고 있는지, 왜 10만명의 국민들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만들라고 하는지 이 한마디에 모두 담겨있다. 역설적으로 대다수의 국민들이 정치를 혐오하고, 세상의 변화보다 각자도생을 선택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 떠들썩해봐야 변하는 건 없을 거라는 경험과 확신을 가진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세상을 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50인 미만 사업장의 법 적용을 유예하고, 야당과 기업이 받아들일 수 있게 내용을 수정하자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안다. 법이 통과돼도 현장에서 법을 적용하려면 기업이 고용한 비싼 변호사와 긴 재판, 고통스러운 생존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 여기서 물러서지 않는 이유다.

생명은 거래의 대상도, 타협의 대상도 아니다. 이 당연한 가치에는 뜨거운 연민도, 차가운 냉소도 필요 없다.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따뜻한 연대와 차분한 이성만 있으면 된다. 일하다 죽은 모든 이들의 이름으로 제대로 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통과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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