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를 선동하는 정치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2019년 8월 미국 텍사스에서 총기 난사 사건으로 22명이 사망했다. 용의자는 극우 커뮤니티 사이트에 이민자에 대한 증오심이 담긴 선언문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 등 몇몇 극우 정치인들의 이민자에 대한 부정적 언사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뒤따랐다. 미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인종, 종교, 동성애, 트랜스젠더, 여성 등에 대한 혐오 선동을 일삼는 극우정치인들이 세계 곳곳에서 등장하고 있다. 동유럽의 트럼프라 불리며 이주자, 난민,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선동을 일삼던 정치인들이 체코와 헝가리에서 정권을 잡았고, 러시아, 콜롬비아, 이탈리아, 우크라이나, 그리스, 이라크, 일본, 필리핀 등에서도 정치지도자들의 혐오 선동이 계속되고 있다. 일촉즉발의 상황인 경우도 있고, 이미 다양한 형태의 폭력이 현재 진행형인 곳도 있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정치인들의 발언에 주목하는 것은 그 발언이 사회의 바로미터가 되기 때문이다. 2017년 배우 메릴 스트리프가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정치인 등 공인의 발언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해도 된다는 허가를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히틀러가 혐오 선동을 시작할 때, 600만명이 가스실에서 학살당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치인의 사소한 발언 하나하나가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키는지, 그 메커니즘과 비극적인 결과가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다. 혐오 선동을 처벌하는 국가라 해도 처벌 가능한 혐오 선동의 범위는 좁은 편이다. 하지만 정치인의 발언에는 훨씬 더 엄격한 기준이 적용된다. 적극적인 선동은 말할 것도 없고, 혐오와 차별을 암시하는 발언이나 심지어 침묵에도 정치적 책임이 면제될 수 없다. 사소한 발언 하나도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6년 트럼프 당선 직후 혐오범죄가 유의미하게 증가했다는 실증적 자료들이 있다. 영국에서도 이민자들에 대한 거부감을 부추긴 정치선동의 결과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가 감행되었고, 2016년 국민투표 이후 인종과 종교를 이유로 한 혐오범죄가 유의미하게 증가되었다. 일본의 재일 조선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 역시 정부와 정치인들의 책임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2000년부터 2017년까지 세계 각국에서 정치인들의 혐오표현 문제를 조사한 연구는, 정치인의 혐오표현이 테러를 증가시킨다는 점을 입증해냈다(Piazza, 2020).

차별·증오 부추기는 극우 정치인
인종·종교 등 이유로 폭력 정당화
재·보궐 선거 화두 된 ‘성소수자’
정치인의 ‘선택’ 투표로 이끌어야

먼 나라 얘기만은 아니다. 한국에서는 아직까지는 정치인의 혐오 선동이 구체적인 폭력으로 이어진 사례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낙관할 만한 상황인 것은 결코 아니다. 2014년에는 일베 회원으로 알려진 이들이 세월호 농성장 앞에서 자칭 폭식투쟁을 벌였고, 역시 일베 회원으로 알려진 한 고교생이 ‘종북’ 콘서트를 응징한다면서 황산테러를 벌였다. 다행히 이러한 흐름은 2016년 촛불항쟁 이후 일단 주춤했다. 정치적 분위기가 극단적 폭력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다. 2018년 여름 연달아 개최된 제주 예멘 난민 반대 집회에서는 김진태, 이언주, 조경태 의원 등 현역 정치인들이 가세했다. 자유한국당은 난민대책위원회를 결성했고, 난민법 폐지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2019년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는 “외국인은 그동안 우리나라에 기여해온 바가 없기 때문에 똑같이 임금 수준을 유지해줘야 한다는 건 공정하지 않다”고 발언했다. 난민이나 이주자에 대한 반대가 정치적으로 이득이 된다는 ‘계산’이 없었다면 이런 발언이 있을 수 있었을까? 소수자 혐오를 정치적 계산대에 올려 놓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 되풀이될 가능성이 높다.

2021년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서는 성소수자 문제가 화두에 올랐다. 원칙은 온데간데없고,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만 요란하다. ‘차별에는 반대한다’ ‘퀴어축제 자체에 반대하는 건 아니다’라고 말하여 최소한의 체면을 차린 뒤 ‘시민 공감대 형성이 필요하다’ ‘서울광장에서는 안 된다’ ‘시장이 결정할 수 없다’는 등 하나마나한 얘기들로 물을 타는 것이 유행인 듯하다. 소수자 인권 옹호를 자신있게 내세우는 군소 후보들의 분투에서 작은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말에서 시작되어 거대한 폭력으로 이어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 과정이 수십년이 걸리기도 하지만, 단 몇 달 만에 극단적인 사태로까지 치닫기도 한다. 이 흐름에서 가장 중요한 속도조절자가 바로 정치인이다. 타오르고 있는 불에 기름을 부을 수도 있고,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치인의 선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유권자 시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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