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자연

텃밭을 가꾸며 떠오른 생각을 적은 조선시대 윤현(尹鉉)의 칠언절구가 있다. 뾰족한 마늘 싹, 가는 부추 잎, 아욱과 파의 파란 새싹이 돋는 것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본 시인은 무사자연귀유사(無事自然歸有事)라고 적었다. 정민은 <우리 한시 삼백수: 7언절구 편>에서 “일없는 자연에서 도리어 일 많으니”로 새겼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자연에서 저절로 놀라운 생장이 일어나는 것에 감탄한 글귀다. 매년 봄 목련이 피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도 감동해 경이감을 느낀다. 봄은 늘 기적처럼 저절로 온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때맞춰 변하는 자연을 보며 우리는 매번 감탄한다. 하지만 자연이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일까? 기나긴 겨울 지난한 과정을 묵묵히 이어갔기에 때맞춰 목련이 피어난다. 창공의 새도 저절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둥지를 만들어 알을 낳고 먹이를 물어와 새끼를 기르는 온갖 노력의 과정이 이어지지만, 우리는 하늘을 나는 새를 잠깐 보며 아무것도 안 하는 자연으로 오해할 뿐이다. 우리 인간의 눈에 자연스러워 보인다고 해서 사실 저절로 살아가는 생명은 없다. 각 생명의 연결된 안간힘이 자연의 다른 이름이다.

스스로 그러함을 뜻하는 자연(自然)은 사람의 존재에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 놀라운 일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자주 자연과 인위(人爲)를 나눈다. 어떤 방식으로든 사람의 개입이 전혀 없이 무언가가 일어나는 것이 자연이라면, 인위는 인간이 의지를 가지고 한 사람의 일이다. 발전한 과학기술로 많은 이의 삶이 나아졌지만, 전에는 없던 새로운 부작용도 많아졌다. 사람들이 자주 자연=좋은 것, 인위=나쁜 것으로 나누는 이유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과거=좋은 것, 현재=나쁜 것으로 보는 것과 닮았다. 지나간 것을 그리워하는 사람의 자연스러운 심성 탓에 과거를 당시의 객관적 실상과 달리 더 좋은 것으로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도 많지만, 모든 인위를 거두어내고 오래전 자연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삼중수소 걱정은 전혀 없었던 오래전 인류의 선조는 죽지 않고 어떻게 하루를 살아갈지가 걱정이었다. 인위가 지금보다 적었던 오래전 과거로 돌아가 맘 편히 살 수 있는 현대인은 단 한 명도 없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니 둘 사이를 딱 가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인위에도 자연이 많고, 자연이 보여주는 모습에도 인위를 찾을 수 있을 때가 많다. 자연과 인위를 합한 것이 자연이고, 자연에 끼친 인위의 효과 중 나쁜 것이 있을 뿐이다.

윤현의 시구에서 물리학의 ‘저절로 깨지는 대칭성(spontaneous symmetry breaking)’을 떠올렸다. 물리학의 자연법칙은 이곳저곳을 구별하지 않아 ‘옮김 대칭성(translational symmetry)’을 갖는다. 공간은 균일하지만, 바로 이곳, 나라는 존재로 자연의 옮김 대칭성이 깨진다. 옮김 대칭성이 깨지지 않아 모든 공간이 균일한 우주에는 나도, 당신도, 목련도 없다. 또 우주에 물질과 반물질이 정확히 같은 양으로 존재했다면, 서로 만나 소멸해 현재의 우주도 만들어질 수 없었다. 물질과 반물질 사이의 대칭성 깨짐이 우리 모든 존재를 가능케 한 셈이다. 물리학은 대칭성의 아름다움을 말하지만, 대칭성이 깨졌기에 세상 만물이 존재한다. 본래의 대칭성이 저절로 깨져 자연이 된다. 자연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데(無事自然), 저절로 무슨 일이 생긴 셈(歸有事)이다.

자연은 스스로를 치유한다는 믿음도 문제다. 자연의 회복탄력성은 일정 범위 안에서만 맞는 얘기다. 인간이 만든 약간의 충격은 자연의 평형을 잠깐만 흩트릴 뿐, 자연은 다시 처음의 평형에 자연스레 도달했다. 하지만 충격도 충격 나름이다. 자연의 한계보다 더 큰 충격은 자연도 어쩌지 못한다. 산업화 이후 인간은, 자신도 한 부분으로 삶을 이어가는 지구라는 호수에 조약돌이 아닌 엄청나게 큰 바위를 스스로 떨어뜨렸다. 자연은 생각하지 않는다. 배려도 없다. 인간의 존재에 자연은 무심하다. 인간이 무슨 짓을 해도 지구는 멸망하지 않는다. 인간만이 스스로 멸망할 뿐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지만, 자연은 인간 없어도 자연이다. 우리가 없어도 목련은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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