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의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해묵은 입법 과제 두 건이 있다. 퇴행과 전진을 반복하는 게 역사라지만, 답보 상태가 너무 길다. 노무현 대통령의 ‘4대 개혁 입법 과제’였던 국가보안법 개폐는 논의조차 사라진 지 오래다. 2004년 국가보안법 폐지법안에 서명한 의원 명단을 살펴보니 지금도 정부, 청와대, 국회에서 활약 중인 정치인들의 이름이 눈에 띈다. 국가보안법 개폐에 실패한 후 정부 지지율이 급락했던 트라우마 때문인지, 2004년 이후 국가보안법을 입에 담는 사람들조차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노무현 정신 계승을 말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그토록 하고 싶어 했던 의제는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김일성 회고록’ 출판을 둘러싼 시대착오적 논란이 2021년에 또 반복되었고, 2017년 이후 4년 동안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723건이 접수되었고 94건이 기소되었다. 혁명동지가를 불렀다는 이유로 대법원 유죄 판결이 나온 게 작년의 일이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차별금지법 역시 노무현 정부 때 추진되었다가 결과를 내지 못한 과제다. 다행히 여기서 멈추진 않았다. 2013년 민주당 의원들이 두 건의 법안을 발의했다. 대표발의자인 김한길 의원이 그해 5월 민주당 대표로 선출되었으니 꽤 무게가 실린 법안이었다. 하지만 이 두 법안은 일부 보수 개신교계의 항의에 부딪혀 석 달 만에 철회되었다. 법안 철회는 최악의 뒷맛을 남겼다. 차라리 발의조차 못했다면 다음을 기약하면 된다. 하지만 법안 철회는 반대에 굴복한 적극적인 행위다. 절차적으로는 발의에 참여한 의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서명을 받아야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차별금지법안 반대 세력들은 승리의 기쁨에 환호했고, ‘우리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반대로 정치인들에게는 정치생명을 걸어야 하는 ‘위험천만한 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 후 8년 동안 민주당 의원들은 단 한 건의 차별금지법안도 발의하지 못했다.

국가보안법 개폐·차별금지법
해묵은 입법 과제에 새 바람
지역에서 지켜낸 인권조례
중앙서도 두 법안 관련 발의
이제 국회가 응답할 차례다

법안 철회 사태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차별금지법 철회로 고무된 세력들은 그 후 인권, 인권위, 젠더, 성평등, 차별 등의 키워드가 담긴 법안들을 깨알같이 모니터링하고 시비를 걸었다. 그 결과 19~20대 국회에서 인권교육지원법안(2건), 증오범죄통계법안, 국가인권위원회법 개정안(5건), 혐오표현 규제법안, 정보통신망법 개정안, 성차별금지법안, 아동복지법 개정안 등 멀쩡한 법안들이 철회되었다. 새누리당·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법안을 냈다 성급히 철회했던 것이 블랙코미디였다면, 민주당 의원들이 안이한 생각으로 법안을 냈다가 철회했던 것은 황망하고 서글픈 일이었다. ‘인권위가 강화되면 동성애가 확산된다’는 등의 어이없는 이유로 멀쩡한 법안들이 수차례 철회된 것은 우리 입법사의 가장 참담한 순간으로 남게 되었다. 파장은 지역사회에도 이어졌다. 2014년 서울시에서 인권헌장 제정이 좌절된 것은 2013년 차별금지법안 철회에 비견될 만큼 나쁜 선례가 되었다. 2012년 이후 70개가 넘는 인권조례가 입법예고되었다가 철회되었고, 급기야 2018년에는 충남과 충북 증평군에서 인권기본조례가 폐지되는 사태로까지 이어졌다.

다행히 반격의 조짐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지역에서 먼저 힘을 냈다. 인권조례가 폐지되었던 충남은 2018년 의회 구성이 바뀌자 즉시 인권조례를 제정했다. 지금은 17개 광역지자체 모두와 절반이 넘는 기초지자체에서 인권조례가 꿋꿋이 버티며 시행 중이다. 지난 3월에는 경기, 서울, 전북, 광주에 이어 충남교육청에 학생인권센터가 설립되었고, 서울교육청은 일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소수자 학생 인권보호가 명시된 ‘제2기 학생인권종합계획’을 수정 없이 시행하고 있다. 중앙정치에서 방치되어 왔던 인권과 차별금지의 이슈들이 지역에서는 힘겹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중앙정치에서도 변화가 시작되었다. 2020년 6월 정의당 의원들은 총선 공약대로 차별금지법안을 발의했고, 민주당 의원들도 평등법안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0월에는 민주당의 젊은 초선 의원들이 국가보안법 개정법안을 발의했다. 그동안 방치되어온 이 개혁 의제들의 불씨를 살려온 것은 전적으로 시민사회의 힘이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와 국가보안법폐지국민행동에 한국을 대표하는 시민사회단체들이 합류했고 10만 입법청원운동을 시작했다. 이번만큼은 구체적 결과를 내보겠다는 의지가 어느 때보다 뜨겁다. 15년 넘게 방치되어왔던 국가보안법 폐지, 차별금지법 제정이 가시화된 것이다. 이쯤 되었으면 무관심이나 침묵은 더 이상 부작위나 중립이 아니다. 이제 국회가 응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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