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의 4·7 재·보선 승리에 대해서는 ‘이제 표를 줘도 될 만한 당이 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가장 그럴듯하다. 여권에 아무리 실망했더라도 극우와 손잡은 황교안 대표의 자유한국당이었다면 표를 주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들이 주위에 꽤 있다. 지난해 총선 이후 김종인 비대위원장의 행보가 당의 이미지를 중화(中和)시켰는데 그중 5·18묘지 앞 ‘무릎사죄’가 컸다. 한여름 뙤약볕 돌바닥에 무릎을 꿇은 80대 노정객의 모습은 빌리 브란트 총리의 ‘역사적 사죄’까지는 아니더라도 국민의힘을 일으켜 세우기엔 족했다. 그가 떠났으니 ‘도로한국당’이 될 것이라는 관측도 요즘 그 당의 움직임을 보면 ‘글쎄요’다.
지난달 출판사 민족사랑방이 북한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출간했다. 보수단체가 법원에 판매·배포 금지 가처분 신청을 했고, 놀란 서점들은 책 판매를 중단했다. 여기까지는 늘 봐오던 사태 전개였는데 그 흐름을 바꾼 건 뜻밖에도 국민의힘이었다. 하태경 의원은 “북한 정보를 모두 통제해야 한다는 건 국민을 유아 취급하는 것”이라며 “국민을 믿고 표현의 자유를 보다 적극 보장하자”고 했다. 국민의힘 논평(박기녕 부대변인)도 “국민의식과 체제의 우월성을 믿고 국민에게 판단을 맡기자”였다. 법원도 “이 책이 신청인들의 인격권을 침해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회고록에 대한 야당과 법원의 대응은 ‘문재인 정부 들어 국가보안법이 사문화(死文化)됐다’는 세평을 떠올리게 한다. 처벌받은 이도 크게 줄었으니 그리 여길 만도 하다. 그러나 이 법으로 단 한 명이라도 부당한 피해를 입었다면 사문화가 아니다. 2018년 8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된 대북사업가 김호씨의 경우를 보자. 검찰은 김씨가 북한이 개발한 얼굴인식 프로그램을 국내에 판매하면서, 북한에 개발비 등을 제공하고 군사비밀을 누설했다는 혐의를 적용했다. 하지만 김씨는 남북교류협력법에 따라 통일부의 승인을 받아 사업을 해왔다. 더구나 국가정보원 직원들과 2년 이상 관계를 지속하며 격려금까지 받았다고 하니 사업 보증도 받은 셈이다. 검찰 공소장에는 김씨가 북한에 건넨 프로그램 개발비가 ‘북한 당국의 외화벌이 사업이나 대남공작 사업 등의 통치자금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높다’고 돼 있다. 실현된 행위가 아니라 가능성까지도 단죄하는 국가보안법의 속성을 보여준다.
국가보안법은 정부 수립 직후 혼란기에 제정된 한시법임에도 일종의 국체(國體)처럼 군림하면서 지난 70여년간 민주주의를 억압해왔다. ‘국가보안법 체제’는 일본의 천황제와도 닮았다. 일본은 패전 이후에도 군주제를 유지함으로써 일본인들의 시민적 자율성을 억압하고 신민(臣民)적 순응성과 획일성을 강화했다. 국가보안법도 한국인의 사고·판단능력을 마비시키고 순응성과 획일성을 강화시켰다. 친북·종북으로 몰릴 우려가 있으면 사람들은 맞서 시비를 가리기보다 회피하는 데 급급해한다. 심리학자 김태형의 지적대로 금기(禁忌)는 연상의 고리를 따라 확대되는 만큼 금기가 하나라도 있으면 전체 사고기능이 저하된다. 2012년 대선 당시 ‘노무현 대통령 북방한계선(NLL) 포기 논란’은 당시 새누리당이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 제기한 의혹이지만 온 나라를 판단마비 상태로 몰면서 선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보통 사람들은 상관없지 않냐고? 종북몰이 광풍으로 선거 결과가 민심을 역행하는 ‘민주주의의 퇴행’이 시민의 삶과 무관할 수 있는가.
보수야당의 달라진 태도가 국가보안법 개폐 당론으로까지 이어질지는 두고볼 일이지만, 회고록에 대한 반응은 ‘사상의 시장개방’을 용인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런데 맞장구치며 분위기를 띄워야 할 더불어민주당이 왠지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일부 의원들이 일본 군국주의 찬양 행위를 처벌하는 역사왜곡방지법안을 발의한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법안이 역사해석을 독점하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보수의 비판은 타당하다. 규제 대상이 다르지만 ‘사상의 시장독점’을 꾀한다는 점에선 국가보안법과 마찬가지다. 친북이건 친일이건 이젠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자연스럽게 걸러지도록 해야 한다.
지난 10일 시작된 ‘국가보안법 폐지 국민동의청원’은 불과 열흘 만에 10만명이 서명했다. 국회가 나서지 않으면 직무유기가 된다. 근대성을 억압하는 법이 세계 10위 선진국에서 73년째 작동하고 있는 것은 나라의 수치다. 민주당은 엉뚱한 데 힘쏟지 말고 국가보안법 폐지에 당력을 모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