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침과 이어짐

채효정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장

아침부터 총소리가 들린다. 인근에 군부대가 있다. 하루 종일 탕 탕탕 탕탕탕 소리를 듣고 있으면 두통에 현기증까지 생긴다. 포격 훈련은 더 심하다. 쿵 쿠웅 콰르르 땅이 울린다. 어떻게 사셨어요? 나도 처음엔 놀랐지, 시집와서 밭 매다가 뒤로 쿵 주저앉았지 뭐야. 평생 살아온 분은 살다 보니 적응이 됐다고 한다. 소도 나랑 똑같더라고, 주저앉고, 어떤 놈은 유산도 해버리고. 옛날엔 흙벽이 무너지기도 했다는 접경지역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총소리를 들으며 감자도 심고 깨 모종도 내고 산다. 이사 온 동네는 아름다운 곳이지만 나는 종종 풍경에 멀미가 난다.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의 기묘한 부조화 때문일 것이다.

채효정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장

채효정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장

십여년 전,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논벼가 넘실거리던 마을은, 이제 대규모 시설하우스와 인삼밭으로 빼곡하다. 차로 20분쯤 거리에 쓰레기 소각장이 있고, 가는 동안 시멘트 공장과 택배회사 물류창고를 차례로 지난다. 조금 더 가면 댐에 가둔 물, 지나는 길 곳곳에 고압송전탑과 태양광 발전시설, 나무가 다 베어져나가 여름에도 붉은 민둥산을 만난다.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댐에 갇힌 물 아래는 이곳 사람들의 사라진 고향이 잠겨 있다. 새롭게 떠오른 농촌의 풍경 속에는 이주노동자들과 결혼 이주여성들이 구석구석 잠겨 있다. 읍내 하나로마트엔 몇 해 전에 ‘아시안 푸드 코너’가 생겼다. 선반이 해마다 한 칸씩 늘어났지만 나는 여기서 물건을 사는 ‘아시안’들을 자주 보지는 못한다. 우리의 시간과 동선은 잘 겹치지 않는다.

지도 위에 송전탑, 쓰레기처리장, 대규모 발전소, 물류센터, 축산단지, 군사기지를 찍으면 대부분 농촌과 시골 마을에 겹쳐져 있다. 왜 어떤 곳에선 볼 수 없는 것들이 어떤 곳에선 계속 나타나는 걸까. 나오미 클라인의 책 <미래가 불타고 있다>에는 이와 유사한 겹침의 장소들이 나온다. 파키스탄부터 예멘, 소말리아, 이라크, 가자지구, 리비아에 걸친 지역에 서구 국가들이 투입한 드론 타격지점은 연평균 강수량이 200㎜인 건조경계선과 정확히 겹친다. 처음에 원유 자원이 풍부한 곳을 따라가던 서구 전투기들의 경로를 지금은 가뭄으로 갈등이 고조된 물 부족 지역을 드론이 따라가는 것이다. 우연의 일치는 계속 이어진다. “전투기 폭격이 원유가 있는 곳을 따라가고 드론 공격이 가뭄이 있는 곳을 따라가는 것처럼, 전투기와 드론의 폭격이 있었던 곳에는 난민을 가득 실은 배들이 나타난다.”

우연히 겹치는 지도는 유럽으로 이어진다. 장 지글러는 <인간 섬>에서 ‘그곳’의 지도에 나타났던 ‘난민을 가득 실은 배들’이 도착하는 ‘이곳’의 모습을 보여준다.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지중해의 해안선을 따라 유럽 국경관리 체제가 띄운 감시 드론이 나타나고, 드론 아래로 바다를 향한 무인발사대가 나타난다. 이 난민봉쇄의 경계선과 유럽 탄소국경이 겹치는 것이 우연의 일치일까? 자본과 자원과 인간의 세계적 이동을 장려했던 유럽이지만 지금 유럽연합(EU)의 환경 안보정책은 두 종류의 이동을 강력하게 통제한다. 하나는 탄소고 다른 하나는 난민이다. 삶터를 잃고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발자국은 탄소의 국경선에서 멈춘다. 이런 국경 봉쇄하에서만 가능한 유럽식의 기후위기 대응은 ‘무장한 구명보트’ 전략이라고 비판받는다. 매년 수천명의 난민들이 익사체로 발견되는 지중해는 유럽 시민들의 구명보트를 띄울 수 있는 분리의 선이다.

그곳의 겹치는 선들은 우리가 사는 이곳으로도 이어진다. 참외 농사를 짓던 마을에 사드 미사일 기지가 들어온 성주 소성리, 해녀들이 물질하던 바다에 해군기지가 들어선 제주 강정마을, 핵발전소를 막아내니 이제 명사십리에 썩은 모래를 부으며 석탄화력발전소를 짓고 있는 삼척 맹방 해변은 우리 안의 팔레스타인이고, 드론과 난민이 함께 출현할 경로다. 그러나 탄소 물신주의와 탄소 환원주의는 이 겹치고 이어지는 정치적 힘의 관계를 모조리 잘라버린 후 우리의 삶터를 탄소의 공간으로 평평하게 재편한다. 댐이 되고, 발전소가 되었던 곳은 이제 태양광, 풍력, 수소발전, 바이오매스 생산 기지가 되어 탄소흡수원으로 거듭날 것을 요구받는다. 탄소배출원의 노동자들은 탄소와 함께 감축된다. 겹쳐진 시간에 쌓인 역사의 깊이를 성찰하지 못하는 탄소의 셈법은 기후위기의 진실을 가리고 잘못된 대안들로 인도한다.

나는 요즘 계속 생각한다. 여기 구명정을 가진 사람과 구명정 없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이는 무장을 준비하고 어떤 이는 수영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어디서 시작해야 하고 누구와 어떻게 이어질 것인가. 소도 나와 같더라는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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