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의 시야, 개혁의 호흡

박경신 고려대·오픈넷

개혁을 가장 어렵게 만드는 것이 무얼까? 이념의 충돌일까? 하지만 각자의 이념이 옳다고 믿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념의 충돌을 장애물이라고 보는 것은 여행자에게 여행의 장애물이 이동거리라고 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느 한쪽의 이념이 옳다고 가정했을 때 장애물이 무엇일까? 현실과 이상의 충돌이 아닐까 생각한다. 현실에는 국경도 있고 집단도 있고 감정도 있지만 이상에는 그런 것들이 없다. 결국 100년 앞을 내다볼 때 이상적인 개혁과 당장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줄이는 개혁 두 가지 중 어디에 더 중점을 둬야 하는지 혼돈이 생긴다.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명예훼손 모욕 형사처벌이 국제인권법에서는 이미 수십년 동안 인권침해적이라고 비판받아왔지만 당장 체면을 구긴 피해자의 법감정에 신속한 검찰의 칼날만큼 카타르시스를 주는 방법도 없다. 한국에서는 ‘자비는 없다’는 말은 명예모욕고소와 동의어가 되어버렸다. 임대차3법은 건물주와 임차인 간의 힘의 균형을 더욱 평등하게 만든 장기적인 포석이지만 당장은 전세가를 높여 전세를 타고 저축과 주거를 동시에 시작해야 하는 가정들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 조금만 인내를 하면 다른 선진국들 수준의 임차인보호제도가 정착하겠지만 내릴 줄 모르는 전세가와 집값에 휩쓸려 정권이 바뀌어버리면 임대차3법은 폐지되고 실패한 개혁으로 기록될 것이다.

시간적 지평을 얼마나 멀리 바라봐야 하는가뿐만 아니라 보호대상의 범위를 얼마나 넓게 봐야 하는가도 문제이다. 반값등록금제도는 대학에 진학하는 다수에게는 도움이 되지만 보완책 없이 시행되었다면 대학에 못가는 소수(약15%)에게는 학력차별과 상대적 빈곤을 더욱 심화시켰을 것이다. 더욱 명확한 사례들도 있다. 변협이 중노동에 시달리는 변호사들의 이익을 변호하겠다며 벌이고 있는 변호사 증원반대 운동은 변호사집단 밖에서 제대로 된 법률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국민들을 고려하지 못하는 집단이기주의이다. 고려대가 성적장학금을 저소득층장학금으로 전환한 것에 우등생들이 분개하는 것도 기존 수혜자 입장에 갇힌 것이며 거꾸로 카이스트가 장학금에 성적요건을 붙였다고 해서 ‘신자유주의’라고 반발하는 것도 카이스트 밖에서 성적을 유지해야 장학금을 받는 이공계학생들과의 형평성을 간과하는 것이다. 복지는 전 사회적인 시각에서만 정의롭다.

더욱 어려운 문제는 약자가 겪을 수 있는 위험의 가능성에만 천착하면 약자가 실제로 겪는 피해를 키울 수 있다는 점이다.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과 이를 통한 진실의 발견, 이를 토대로 한 정의의 구현이 장기적으로는 중요하겠지만 이 과정에서 동반될 수 있는 프라이버시나 평등권의 침해에 대한 공포도 우리의 선택지를 제한한다. 미국이 엄청난 정보통신 인프라뿐만 아니라 법질서에 대한 신뢰가 정착되어 있음에도 한국과 같은 강제적인 코로나바이러스 접촉자 추적(contact tracking)을 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역사적으로 흑인들이 경찰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불신이었다. 결과적으로 방역이 완전 실패하면서 백신이 나오기 전까지 미국은 최대피해국이 되었고 그 피해는 저소득층에게 집중되었다.

여성주의 내에서도 당장 남성들의 차별과 폭력으로부터 여성들을 보호하는 것에 집중하는 쪽과 여성들이 남성들과 동등하게 살아가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섹스와 관련되어 여성에게 씌워진 족쇄를 해소하려는 쪽 사이의 투쟁이 치열하다. 예를 들어 이제는 누구도 성매매를 더 이상 성착취나 성범죄와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매매가 비범죄화될 경우 인신매매도 늘어날 수 있다는 위험에 근거한 주장,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켜 성범죄에 대한 경계를 해이하게 한다는 주장이 한국에서 주류로 자리잡고 있고 결과적으로는 수많은 성노동여성들을 음지로 복지사각지대로 내몰고 있다.

우리 모두의 기대수명이 조금만 더 길다면 어떨까 상상해본다. 현실에 민감하면서도 세대가 바뀌면서 더욱 이상에 가까워져야 할 의무에 충실하다면 더욱 긴 호흡으로 개혁과제들에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글을 쓰는 동안 가슴 아프게도 검찰의 공소장을 기소 후 3개월 이후에야 공개한다는 퇴보의 소식이 들려온다. 조금 긴 호흡에서 정권이 바뀐 후에 이런 규정이 어떻게 남용될지 생각했다면 어땠을까? 환경운동은 다음 세대를 위한 운동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물론 기후변화의 위험과 핵폐기물의 위험 사이에서 진보세력은 진동하면서 일관된 원전정책이 나오지 않고 있지만 적어도 과학의 영역 내에서 토론이 진행되고 있다. 다른 부문의 운동들도 전 사회적인 시야와 더욱 긴 호흡을 기대한다.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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