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과 고통의 듣기 평가

신형철 문학평론가

읽는 것이 직업인 비평가에게 아픈 것은 이런 질문이다. ‘타인의 말을, 잘 읽는 만큼 잘 들으시나요?’ 그러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답할 수밖에 없다. ‘잘 듣는 데 실패하기 때문에 잘 읽어보려고 애쓰는지도 몰라요.’ 타인의 말을 잘 듣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이다. 줌파 라히리의 초기 소설 중에 ‘질병 통역사’를 소재로 한 것이 있다. 환자와 의사가 서로 다른 언어 사용자일 때 환자의 증상을 의사에게 정확히 통역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물론 여기서 핵심은 언어의 번역이 아니라 감정과 고통의 전달 가능성이다. 의사와 환자가 같은 언어 사용자일 경우라도, 심지어 우리의 일상적 대화 상황에서도, 누군가 그런 역할을 해주었으면 싶다. 각자의 감정과 고통은 서로에게 외국어일 때가 많으니까.

신형철 문학평론가

신형철 문학평론가

이를테면 이런 것을 감정과 고통의 듣기 평가라고 해도 좋을지 모른다. 한 환자가 “저는 이제 가망이 없는 건가요?”라고 물을 때 의료진은 어떻게 답하면 좋을까? ①“그런 말 하지 마세요, 더 용기를 내셔야죠.” ②“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시는 게 좋아요.” ③“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④“그 정도로 아프시면 그런 생각도 들 수 있어요.” ⑤“이제 가망이 없는 건가… 그런 기분이 드시나 봐요.” 이 설문은 일본에서 터미널 케어(말기 암 환자처럼 치료 가능성이 없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 행위)에 종사하는 의료진을 대상으로 행해진 것인데, 소통을 연구하는 철학자인 와시다 기요카즈(<듣기의 철학>)나 우치다 다쓰루(<소통하는 신체>) 등도 인용한 바 있는 유명한 사례다. 정답은 무엇일까?

의사와 의대생들은 대부분 ①을, 간호사와 간호학과 학생들은 ③을 택했다고 한다. 매뉴얼에 가까운 당연한 선택이라고 할 만하다. 흥미로운 것은 정신의학과 전문의들만이 특별하게도 ⑤를 많이 택했다는 결과다. ⑤는 환자의 질문을 그대로 되풀이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무의미한 대응처럼 보이는데 어째서 적절한 응답이 될 수 있는가. 이 경우 환자에게 중요한 것은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 내 불안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있는가 하는 것이고, ⑤는 바로 그것에 확실한 답이 되어주는 반응이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의 말을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말은 내게 전해졌습니다.’ 이것이 확인되는 순간 환자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요컨대 듣는다는 행위의 첫 번째 핵심은 듣고 있음을 알려주는 데 있다.

듣는다는 행위의 첫 번째 핵심은
듣고 있음을 알려주는 데 있다
정치인들이 공정을 얘기하지만
청년들의 진짜 얘기 못 듣는다면
‘불안’을 표 얻기에 이용할 뿐이다

정치인은 의사가 아니지만 그들도 제 시대의 증상을 다룬다. 우리 시대의 ‘공정’ 열풍도 하나의 증상일 것이다. 임명묵(<K-를 생각한다>)에 따르면 1990년대생에게 공정은 ‘가치’라기보다는 ‘감정’의 문제, 즉 불안에 대한 반응이다. 그들이 공정에 민감한 것은 “그들이 느끼는 불안 속에서 유일하게 예측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국가 시스템, 즉 정서적 안정의 최소한의 기반이 흔들리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시스템에 손을 대서 예측 가능성을 교란하여 불안을 키우기보다는 차라리 능력주의라는 예측 가능성을 추구하겠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차별은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이 설명을 읽고 나면 알게 된다. 역시 문제는 불안이라는 것. 이젠 낡아버린 표현이지만, 불안이 영혼을 잠식한다는 것.

이제 주요 정치인 대다수가 공정을 얘기한다. 정치가 청년의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 사회는 왜 공정하지 않은 겁니까?”라는 질문에 “우리 사회가 공정하지 않다… 그런 생각이 드시나 봐요”라고 응대하는 데까지는 이르렀다고 해야 할까. 이런 응대가 질문자의 마음을 열기는 하겠으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이후에 나올 진짜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공정 강조가 하나의 증상이기 때문에 그 증상의 심층 원인으로 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정?”이라는 질문에 “공정!”이라는 답으로 응수하는 것은 불안이라는 근원적 병인을 제거하지 않고 증상만 관리하는 대증요법에 가깝다. 특히 정치인이 그 단계에서 멈춘 채로 표를 얻는다면 그 불안을 이용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할 것이다.

토론 대회로 정당 대변인을 뽑는 ‘공정한 경쟁’ 이후에도 삶은 지속된다. 승자는 승리의 정당성까지 가져갈 수 있지만 패자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경쟁이 공정하면 그 결과로서의 차별은 감수하겠다는 청년들의 말이 오역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막막한 불안보다는 낫다는 뜻이지, ‘졌지만 잘 싸웠다’는 것만으로 삶이 유지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공정한 경쟁이 아무리 많아져도, 그것이 경쟁인 한, 누군가의 패배의 횟수와 눈물의 양도 늘어난다. 그 삶이 그럼에도 살아질 수 있는 가치와 제도가 주어져야 한다. 전범선이 그의 칼럼에서 환기한 대로 “공정은 거래나 싸움을 수식할 때나 쓰는 말”일 뿐이다. 정치의 언어는 우리의 삶이 거래나 싸움에 불과한 것일 수 없다는 단호한 거절의 언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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