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 같아서 좋냐고요?

우리 동네에는 중증 장애인분들이 생활하고 있는 빌라가 있다. 이 빌라에는 주로 전신마비, 하반신마비의 장애인분들이 입주해 있는데, 시설이 아니라 각 장애인이 자신의 이름으로 임대한 주택이다. 빌라 한 채에 이런 주택들이 모여 있어 의료와 간호, 돌봄을 제공하기에 원활하면서도 주택 입주자인 장애인들의 사생활과 개인 공간이 보장되는 그야말로 엄연한 ‘집’이라, 새로운 커뮤니티 케어의 모델로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이 ‘집’이라는 공간이 새로운 돌봄 모델에 대한 정책적 상상력의 발목을 잡는 것 같다. 집이라고 하니 가족이 연상되고, 가족 같은 돌봄이라는 단어가 바로 소환되는 일이 생기니 말이다.

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 가정의학과 전문의

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 가정의학과 전문의

며칠 전 우리 동네를 방문한 고위 공무원 한 분이 이 빌라도 둘러보러 왔다 한다. 주택 한 곳을 방문했을 때, 지체장애를 가진 70대 여성 어르신이 활동지원사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어르신, 며느리 같고 참 좋으시지요?”라고 물었다 한다. 이 질문에 어르신은 “며느리는 무슨 며느리입니까. 나를 돌봐주는 선생님이지”라고 답하셨단다.

이 얘기는 우리 사이에서 한참 회자되었다. 대체 커뮤니티 케어, 즉 사회적 돌봄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까. 자신의 질문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문제적인지 상상도 하지 못할 이들에게 말이다.

며느리 같고 좋으시지요? 사실 질문이 아니라 칭찬이라고 한 말이다. 노인과 장애인은 응당 가족들이 돌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가족들 중에서도 여성(며느리, 딸, 부인, 어머니 등)이 돌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칭찬이 가능하다. 가족이 돌보는 것 이외의 상상력이 없기 때문에 ‘가족처럼 돌본다’는 것을 마치 최고의 돌봄인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게다가 이 질문은 70대 여성이라면 으레 결혼을 했을 것이라고,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그 아들도 결혼을 했을 것이라고 전제하는 질문이다. 그 70대 여성이 남자를 안 좋아할 수도, 결혼을 안 했을 수도, 아들이 없을 수도, 아들도 결혼을 안 했을 수도, 며느리가 있더라도 사이가 안 좋을 수도, 며느리가 건강이 안 좋을 수도, 돌볼 수 없는 사정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아니, 며느리에게 특별한 사정이 없더라도 돌보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은가.

이런 질문은 그 70대 여성이 트랜스젠더가 아닌 시스젠더, 동성애자가 아닌 이성애자, 비혼이 아닌 기혼, 자녀가 있는, 그것도 아들이 있는 여성이라고 가정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시부모를 응당 모시는 순종적인 며느리에 대해 전제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뭐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복잡한 세상을 복잡하게 이해하는 건 문제가 아니다. 원래 세상은 복잡하니까. 실제로는 복잡한 세상을 단순하게 이해하기 위해 실존하는 다양한 관계의 사람들을 떠올리지 않고, 다양한 정체성의 사람들을 지우고 그 존재를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 폭력이다. 언제나 그런 방식으로 지워지는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 이혼한 사람들, 성소수자들, 자식이 없는 사람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아닌가. 또한 딸/며느리로서 아이를 키우거나 직장을 다니는 뚜렷한 이유가 없다면 당연히 시부모님/부모님을 돌볼 것이라고 기대되고 강요받는 여성들이 아닌가.

우리는 이 대화를 전해듣고 한참을 호쾌하게 웃었다. 며느리 같아서 좋냐는 질문에, 며느리가 아닌 직원에게 왜 며느리라고 부르냐는 대답. 어머니 같은 보살핌이니, 딸 같은 돌봄이니, 며느리 같은 효도니 하면서 다른 관계로 비유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의 관계를 있는 그대로 얘기하는 것. 어찌 보면 이 대답이 훨씬 더 단순하지 않은가. 지혜로운 어른의 모습에 경탄! 오히려 이런 지혜에서 새로운 돌봄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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