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의 특별한 한국 사랑

고호윤 카자흐스탄 나자르바예프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2018년 여름 필자가 재직하고 있는 대학의 카자흐스탄 학생들을 대상으로 포커스그룹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주제는 ‘K팝이 카자흐스탄 고려인의 한인 정체성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포커스그룹 고려인 참가자들을 모집하다 보니 공교롭게도 모두 여성이었고 나이도 14~22세 사이의 매우 젊은 연령대였다. 자연스럽게 주고받으며 대화가 이어지다 각자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기에 이르렀고 그날 고려인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유년 시절을 회상했다.

고호윤 카자흐스탄 나자르바예프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고호윤 카자흐스탄 나자르바예프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내가 한국계인 것이 너무나도 싫어서 죽고 싶었다” “개고기를 먹고 찢어진 눈으로 세상을 보는 흉측한 종족이라는 꼬리표가 항상 붙었다” “내 성(姓) 때문에 빨리 카자흐 사람이랑 결혼해서 남편 성으로 바꾸고 싶었다”라는 내용이었다. 트라우마로 남지는 않았을까 우려될 정도로 아픈 기억들이었다. 한 학생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이내 두세 명이 따라 코를 훌쩍였다. 어린 학생들이 과거라고 떠올리며 나누는 이야기들이 나의 예상과 달리 많은 아픔을 안고 있어 지금까지도 눈에 선하다. 강제 이주의 고통으로 시작된 카자흐스탄 고려인의 역사가 몇 세대가 지난 후에도 여전히 편견과 싸워야 했다는 사실이 더 안쓰럽게 느껴졌다.

카자흐스탄 사람들에게 한국 또는 한국인은 ‘고려 사람’이라는 창을 통해 보이던 때가 있었던 듯하다. 우리에게는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이지만 카자흐 사람들에게는 여러 소수 민족들 중 하나이거나 악착같이 돈 버는 데에 능숙한 사람들이 ‘고려 사람’이다. 봉오동전투와 홍범도 장군의 역사를 배우는 것이 한국에서 카자흐스탄 고려인을 기억하는 방식이라면, 카자흐스탄 고려인이 한국을 기억하는 방식은 무엇일까? 앞서 언급한 연구에 참여했던 학생들이 모두 동의했던 점은 K팝 때문에 자신의 한인 정체성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카자흐스탄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각종 통계 수치로 드러나는 것뿐 아니라 매년 한국어능력시험을 보기 위해 시험장이 있는 도시로 버스를 대절해 이동한다거나, 카페에서 휴대폰으로 한국 드라마를 시청하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대학에서도 한국으로 유학가기 위해 추천서를 부탁하러 오는 학생들, K팝 비즈니스를 알기 위해 한국에서 엔터테인먼트 경영을 배우고 온 교수 등 카자흐스탄의 한국 사랑 사례들을 열거하는 데에 특별한 경험이 필요치 않을 정도이다. 오히려 ‘한류 제국주의’라는 관점으로 한국·카자흐스탄 관계를 이해하는 함정을 피하기 위해서 카자흐스탄 사람들의 한국 사랑이 가져온 아름다운 결과에 한번 더 눈길을 주면 어떨까. 스스로 한국계라는 것이 창피해 어쩔 줄 몰라라 하던 어린 학생들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

“어릴 적 나를 놀리던 친구들이 ‘너 한국인이었어?’라고 물어봐서 놀랐어요. K팝을 좋아한다면서 저한테 한국말을 알려달라고 하더군요. 심지어 내가 한국계인 걸 부러워하는 눈치였어요.” “K팝 때문에 저는 제가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요.”

김구 선생이 한없이 갖고 싶다 했던 높은 문화의 힘이라는 것은 상대를 제압하거나 우리와 저들을 구분하여 우열을 따진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우리 스스로를 곧게, 당당하게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자연스럽게 문화를 통해 스며든다는 의미인 것 같다. 한인이라는 사실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카자흐 사람들과 함께 생각을 나누면서 카자흐스탄 시민으로 당당히 살고 있는 어린 학생들이, 한국이라는 나라가 카자흐스탄에서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오늘 한국을 국빈 방문하는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을 한국에서 따뜻하고 반갑게 맞이해 주었으면 좋겠다. 더 많은 고려인 후손들이 한국계임을 자랑스러워할 정도로 카자흐스탄이 한국을 많이 사랑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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