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중재법 말고 미디어 바우처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가짜뉴스를 막는다는 취지로 여당이 단독으로 입법을 추진하던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25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지 못해 일단 제동이 걸렸다. 정부와 여당은 개정안을 밀어붙이지 말고, 보다 근본적이고 합리적인 해결책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대안으로 언론의 재정 독립성을 강화하고 가짜뉴스 생산을 언론 스스로가 억제할 유인을 제공하는 미디어 바우처의 도입을 적극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징벌적 손해배상 도입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에 대해 야당뿐만 아니라 언론계, 학계, 시민단체들도 가짜뉴스를 막기보다는 정당한 보도를 위축시키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2005년 삼성 X파일 보도와 같은 재벌 비리나 2016년 최순실 국정농단 보도처럼 권력형 비리 사건은 보도 초기에 사실관계가 온전히 드러나기 어려운데, 징벌적 손해배상에 대한 위협이 이런 보도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언론 보도가 사생활 핵심 영역이나 인격권을 침해하는 경우 언론과 포털 등에 기사열람차단을 청구할 수 있는 열람차단청구권도 독소조항으로 꼽힌다. 보도의 사실 여부를 떠나 전략적 봉쇄 전략으로 악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명예훼손죄로 형사처벌과 언론중재위나 민사재판을 통한 손해배상도 가능한 우리 실정에서 개정안은 과잉 입법이라는 지적이다.

한국 언론의 문제는 비단 가짜뉴스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취약한 재정 상태로 인해 언론의 독립성과 중립성이 훼손되고, 양질의 콘텐츠보다 자극적 내용의 생산에 언론이 경도되어 있다. 언론의 공공성과 공공재적 성격을 감안할 때, 언론의 독립성을 제고하고 가짜뉴스 생산을 스스로 검증하고 억제하도록 유인하는 미디어 바우처의 도입을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미디어 바우처는 최근 미국에서 지역 신문의 소멸을 막고 미디어의 다원성을 유지하기 위한 정책 수단으로 논의되고 있다. 예를 들어 시카고대학의 스티글러센터 보고서(Stigler Committee on Digital Platforms, 2019)는 다음과 같이 제언하고 있다. 미국 재무부가 매년 성인 한 명당 50달러의 미디어 바우처를 제공하고, 종합소득세를 신고할 때 각자가 이 바우처를 5달러씩 최대 10개까지 쪼개어 조세당국에 자신이 선호하는 언론매체에 대한 기부 의사를 밝힐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익명성의 보장을 위해 미디어 바우처 기부를 전자 투표처럼 처리해야 하며, 양질의 정보 생산을 유인하기 위해 몇 가지 조건을 부과할 것을 제언하고 있다. 먼저, 지원대상 언론매체는 한 명 이상의 저널리스트를 고용해야 하며, 언론매체의 소유주와 1% 이상 지분을 보유한 주주의 명단을 공개해야 하며, 또 이들 소유주 각자에 대해 그들의 주요 수익원을 공개하도록 하고, 각 매체는 재무제표와 기업지배구조를 공개하고 윤리강령을 채택해야 하며, 독립적인 기관을 통해 이런 정보들의 진위를 확인해 바우처 보조금 지급 대상을 확정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또한 바우처 지원이 특정 매체에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하나의 매체가 바우처 전체 지원액의 1% 이상을 수령할 수 없도록 하고, 이 기준을 초과해 지정된 바우처 지원금은 1% 수령 매체를 제외한 언론매체들의 지정 비율에 따라 재분배하자는 것이다. 미국에 약 2억6000만명의 성인이 있으므로, 한 매체가 미디어 바우처로 지원받는 최대금액은 약 1억3000만달러로 제한되는 셈이다.

스티글러센터 보고서의 제언을 참고해, 국내 실정에 맞는 지원대상 언론매체 선정 기준과 미디어 바우처 액수 등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먼저 보고서의 지원대상 선정 기준에 더해서, 가짜뉴스를 생산한 이력이 있는 언론매체를 지원대상에서 2년 또는 3년간 제외하는 방안도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정부 지원을 받는 언론매체나 민간기업이 대주주인 언론매체도 지원대상에서 배제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21대 총선 기준으로, 우리나라 성인(유권자) 수가 약 4400만명이므로, 성인 1인당 2만원의 미디어 바우처를 지급하면 약 8800억원의 예산이 필요하다. 개별 매체에 대한 최대 지원금액을 전체 지원액의 5%로 정하면, 특정 언론사에 대한 최대 지원액은 440억원이 될 수 있다. 2021년 한국 정부의 예산 규모가 약 558조원임을 감안하면, 바우처 지원금 총액은 예산의 0.16% 수준이고, 정부 R&D 지원금 27조원의 약 3.3%에 해당된다. 또한 2020년에 KBS 수신료 징수액인 약 6790억원보다 2000억원 정도 많은 수준이다. 언론의 중립성과 다원성의 사회적 편익을 고려해, 적정 규모의 미디어 바우처 도입을 국회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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