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극복으로서의 ‘연구자 권리선언’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

10월 국정감사 중에 민주당 서동용 의원실은 미성년 논문 공저자가 진학한 대학이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최소 30곳에 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 서동용 의원실이 서울대 연구진실성위원회의 결정문을 분석한 결과, 미성년 공저자 논문 전체 64건 중 22건이 연구부정 판정을 받았다. 22건의 미성년 공저자는 교수 자녀 4건, 동료교수 자녀 5건이며, 그중 의과대학 소속 교수 논문이 9건으로 가장 많았다. 그런데 이런 부정행위를 저지른 교수들은 대부분 경고나 주의 같은 ‘솜방망이 징계’를 받는 데 그쳤다 한다. 그러니까 서울대를 위시한 ‘주요’ 대학에는 또 다른 정경심 교수들과 그들을 비호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왜 언론인들과 정치인들은 이 문제를 더 파헤치지 않는가).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

적어도 교수·연구자라면 입시비리나 연구부정 행위에 대해서 분노하고 부끄러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걔들도 했는데…’는 식의 인식은 교수·연구자의 존재 근거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다. 국민대 교수회도 비슷했다. 동문과 시민사회, 그리고 일부 자교 교수들의 정당한 압박에도 윤석열씨 부인의 박사논문 심사에 대하여 아무런 결정도 못하고 궤변을 내놓았다. 사립대(정규직) 교수사회에 만연한 무기력, 무소신, 소심함의 발로는 아닌지 안타까웠다.

이 같은 사례들은 오늘날 ‘대학 자멸’의 풍경의 하나라 생각한다. 대학이 권위와 명예의 원천인 논문과 학위제도의 의미를 스스로 부정하고, 일부 교수들은 그 자체로 ‘부패’세력이거나 또는 그에 기생하는 존재들임을 자인한 것이다. 그런 교수들과 또 그 비호 세력은, 학문의 진리성과 대학의 자원을 약탈하여 자기의 돈·지위·세력을 재생산하려 한다. 그렇게 그들은 사회 전체에 해악을 끼칠 뿐 아니라, 다른 동료와 다음 세대 교수·연구자들의 권리와 명예를 치명적으로 침해한다.

그런데 이 같은 일을 가능하게 해온 신자유주의 대학체제가 몰락·재편되고 있다. 방향 없는 경쟁과 시장주의, 80%가 넘는 사립대학 비중, 교주와 사학재단의 착취와 전횡,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무한한 사유재산의 자유, 그리고 고등교육에 대한 국가적 거버넌스의 부재와 대통령과 위정자들의 무지. 여기에 공동체를 상실한 연구자 스스로의 주체의 위기가 겹치면서 한국 대학체제는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그러니 오늘의 변화는 일종의 자멸이다. 그런데 이 멸망이 당장 대학 내의 약자들과 지방의 삶 전반을 대가로 치르게 하니까 문제다. 마치 한국사회 전반이 그런 것처럼, 특권층과 서울 ‘주요’ 대학의 ‘자유’와 잘못이 지방과 약자들에 전가되는 셈이다. 누가 이에 대처할 수 있을까?

‘대학 디스토피아’의 암운이 꽉 드리운 가운데, 일군의 인문·사회과학 교수와 연구자들이 ‘연구자 권리선언’을 발표하고 나섰다. 선언에 따르면 ‘연구자’란 “진리를 추구하고 연구·교육을 수행하여 공동체에 기여하는” 사람들이다. 연구자들을 육성·보호해야 하는 것은 누리호 같은 것을 개발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공동체의 자기이해와 모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다. 발생하는 문제를 자본과 권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공정하고 인간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찾고 학문적 양심과 이성에 따라 말하는 사람들을 두기 위해서다. 그런데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은 대학의 위기와 함께 존립 자체가 위태롭다.

그래서 ‘연구자 권리선언’을 주도한 사람들은 연구자들이 연구를 계속하게 돕는 안전망의 확보와 그 법적 기반인 ‘연구자 복지법 제정’에 나서려 한다. 또 비정규직교수와 젊은 연구자들의 고용과 처우 개선을 위한 강사법 개정과 ‘연구자 상생기금’ 조성을 도모한다. 한 줄기 가느다란 빛처럼 느낀다.

그런데 연구자들은 국가의 의무와 사회의 관심을 호소하는 것과 동시에, 더 큰 각오와 많은 정성으로 자기모멸과 자기부정을 극복하는 운동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그 운동은 단지 악한 사학재단이나 차별·착취 체제의 일부가 된 기득권에 대한 투쟁뿐 아니라, 잘못된 관행·제도에 젖어 있는 ‘선생님’과 ‘선배님’들, 그리고 자기자신들에 대한 극복과 지양을 포함한다. 각자도생 이외에는 다른 어떤 능력도 발휘되지 못하게 만드는 개인화, 파편화, 무기력과 ‘내 안의’ 언행불일치를 이겨야 가능할 것이다. 내년 봄에 또 많은 비정년·비정규직교수들이 대학을 떠나야 할 거라는 전망이 많다. 모욕을 견디다 한명 한명 쫓겨나는 것 외에 어떤 방법이 있을까. ‘조직’으로 같이 버티는 일 외에 뭐가 가능할까. 조금이라도 마음과 몸을 지금과 달리 함께 움직이지 않고 어떤 일이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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