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 바쳐라

한윤정 전환연구자

실케 헬프리크(1967~2021)의 부음을 알리는 이메일이 왔다. 그는 독일 여성으로 ‘커먼즈(공유운동)’ 이론가이자 활동가이다. 젊은 시절, 하인리히 뵐 재단에서 일했고 개발정치학을 공부하면서 ‘자유롭고 공평하며 활기찬’(<Free, Fair & Alive>는 그의 책 제목) 커먼즈에 투신했다. 미셸 보웬즈, 데이비드 볼리어와 함께 커먼즈전략그룹(CSG)이란 단체를 만들어 활동해왔다.

한윤정 전환연구자

한윤정 전환연구자

2019년 가을, 나는 독일 소도시 네우데나우에 있는 실케의 집에 일주일간 머물렀다. 프랑크푸르트의 지속가능성고등연구원(IASS)과 CSG는 각자의 연구분야인 ‘인류세의 마인드셋’과 ‘커먼즈의 존재론’을 결합한 워크숍을 실케의 집에서 열었고, 나는 IASS 연구에 한국 커먼즈 사례를 소개한 인연으로 행사에 참가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기차를 타고 네우데나우에 내렸을 때, 실케는 낡은 자동차를 몰고 마중 나와서 온몸이 흔들릴 만큼 쾌활하게 손을 흔들었다. 마을은 고택과 가게들이 모인 구시가지를 현대식 주택이 둘러쌌고, 그 바깥은 숲과 농장이었다. 그는 마을광장 분수대 앞, 200년쯤 된 고택을 빌려서 살림집과 사무실로 썼다. 옛날에 곡식을 저장하던 다락방 간이침대가 내 숙소였다.

워크숍에는 여러 나라에서 10여명이 참여했으며 발표·토론·명상·대화·식사·산책 등으로 이어졌다. 소통하는 데 어려움이 컸으나 풍력발전으로 인한 이익을 모두에게 돌려주는 제주도의 ‘공풍(公風)운동’, 유기농사를 짓던 농민이 고령으로 그만두면 그 땅을 사들이는 한살림의 농지공유운동, 그리고 서울 경의선 공유지운동을 소개했다. 섬세한 논의는 잊어버렸지만, 다양한 국적과 배경의 전문가들과 시공간을 공유했던 기억은 특별하다.

그런데 참가자 전체를 수신인으로 지정한 2년 만의 메일은 “실케가 등산을 하다가 사고를 당해서 죽었다”고 전했다. 이제 50대 중반이기에 안타까움이 더했다. 가장 가까운 동료였던 데이비드 볼리어는 자신의 블로그에 길고 슬픈 추모사를 썼고, 로마클럽 회원이자 콜렉티브 리더십 창립자인 페트라 쿠엔켈은 “실케의 죽음을 커먼즈의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가자. 내년은 <성장의 한계>가 발표된 지 50주년이다. 다시 모여 생명을 섬기는 경제를 구상하자”고 제안했다.

이런 며칠간의 교신 속에서 작년에 타계한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을 떠올렸다. 두 사람 모두 ‘생태주의자답게!’ 산 위에서 삶을 마감했다는 연상작용 때문일 것이다. 마침 녹색평론 30주년 기념호(11~12월호)가 나왔고, 동시에 ‘김종철 이후’를 준비하기 위한 1년의 휴간소식을 알렸다. 이 전설적인 잡지가 이제 한 세대의 매듭을 지은 셈이다.

내가 만났던 김종철 선생은 “똑같은 이야기를 30년째 하고 있어요”라고 토로했다. 우리 사회가 그만큼 바뀌지 않는다는 뜻이었지만, 녹색평론의 사상이 그만큼 근본적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경로는 어쨌든 문명 전환은 이제 돌이키기 힘든 시대적 과제가 되었다. 그래서 이 잡지가 숨을 고르면서 그동안 펼쳐놓았던 생태담론을 정리하고 재해석하는 일은 현명한 멈춤이라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이번 녹색평론에 실린 하승수 변호사의 글 ‘농(農)과 자치, 민주주의’는 특별했다. “지금과 같은 권력의 중앙집권적 체제 속에서는 그 권력이 생명의 옹호를 자신의 과제로 떠맡는다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김종철의 1993년 글을 이어받아, 하승수는 현재 시점에서 서울 중심의 경제사회구조가 지역·농촌·생명을 어떻게 착취하는지, 태양광 패널만으로는 왜 에너지 전환이 불가능한지, 정치개혁이 탄소중립과 무슨 관계인지 설명한다.

실케, 김종철, 그리고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듯 느껴지는 활동가, 연구자, 생태주의자, 이상주의자들의 삶과 생각, 언어를 떠올리자 따뜻한 마음이 생긴다. 여전히 세상은 나쁘지만, 그래도 좋아지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이만큼의 진보와 발전을 이뤄낸 인간들이라면, 더 이상 스스로를 망치지 않는다는 데 희망을 걸어야 할 것 같다.

얼마 전, 나의 가까운 친구는 ‘자연에 바쳐라’가 우리 시대의 정신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더 이상 묻지 않았으나 그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돈다. 일부 사람들이 하늘과 땅을 사유화했다. 모두의 하늘에다 이산화탄소를 내뿜어 기후위기를 불러왔으며 모두의 땅에다 자본과 권력을 관철시켜 극심한 착취구조, 빈부격차를 만들었다. ‘자연에 바쳐라’라는 말의 의미는 아직 모호하다. 단, 모든 존재의 유한성을 가리키는 말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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