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소설 키트

인아영 문학평론가

일 년 동안 애쓴 몸과 고생한 마음을 돌아보게 되는 크리스마스와 연말. 거리 두기 강화로 송년 모임이 하나둘 취소되어 어딘지 허전하다면 방구석에서 이불 덮고 읽기 좋은 소설을 권한다. 2021년 발표된 단편소설 중에 집어본, 이름하여 크리스마스 소설 키트.

인아영 문학평론가

인아영 문학평론가

⑴ 이주란 ‘파주에 있는’(창작과비평 2021년 겨울호): “좋은 하루가 뭐지. 자기가 그렇게 말해놓고도 현경은 멍하니 생각에 빠져 있었다.” 조금은 기계적으로 안부를 묻게 되는 나날이지만, 상대의 안녕을 바라는 단순한 인사도 누군가에게는 그렇지가 못하다. ‘좋은 하루 보내’라고 무심결에 말해놓고는 좋은 하루가 뭔지 골똘히 곱씹는 사람은, 아마도 말의 작은 무게에도 상처 입는 사람. 정말로 좋은 하루라는 걸 보낼 수 있길 간절히 소망하는 사람. 연인의 장례를 치르고 칩거하다가 십수 년 전 헤어진 연인과 재회하는 이야기지만, 끈적임 하나 없는 담담한 마음이 파주의 겨울 풍경과 흘러가듯 뒤섞인다. 슬픈 사람이 예상치 못한 호의를 받고 고마워하는 장면이 이주란 소설에서는 한번도 진부한 적이 없다. 그저 눈물 핑.

⑵ 이선진 ‘부나, 나’(자음과모음 2021년 여름호): “반성하지 말고 회복해요, 우리. 뒤를 돌아보기보다는 앞으로.” 도서관 사서 ‘나’는 매일같이 부서지는 눈사람을 보면서 늘 부정하고 회피하는 자신을 돌아본다. 동료 ‘부나’와 로맨틱한 관계가 진전되려 할 무렵, 호모포빅인지 디나이얼인지 모를 장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기어이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야 마는 ‘나’. 그러나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오늘만 마시고 죽자는 부나는 아랑곳없이 매력적이고 씩씩하다. ‘반성하지 말고 회복하자’는 말은 어쩐지 새해에 자주 떠올리고 싶은 부나의 목소리.

⑶ 민병훈 ‘겨울에 대한 감각’(악스트 2021년 1/2월호): “모두 같은 계절에만 머물다가 사라질 것 같았다. 그래도 될 것 같았다.” 겨울에 대한 생생한 감각이 한꺼번에 몰려오고 흩어지고 다시 몰려오기를 반복한다. 아버지의 죽음과 병상, 어머니와 떠난 오키나와 여행, 바람이 세게 불어오는 운하, 우산 사이에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 “사건이 아닌 이미지”로 선명한 문장들은 앨범 속 사진을 뒤섞듯 낯설게 배치되고 민병훈의 문장답게 순도 높고 단단하다. 천천히 오래 읽고 싶고 또 그래야 하는 소설.

⑷ 박솔뫼 ‘만나게 되면 알게 될 거야’(문학동네 2021년 봄호): “크리스마스에는 어김없이 집에서 청소를 하였으며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명동성당 근처 건물 옥상으로 가서 성당을 바라보며 기도를 하였다.” 크리스마스날 건물 계단에 혼자 앉아 울고 있던 서원이 하얀 천사를 만나는 줄거리지만, 어쩐지 ‘환상’이나 ‘신비’ 같은 수식을 붙이고 싶지가 않다. 박솔뫼 소설에서 매일 밥 먹고 산책하고 텔레비전 보고 씻고 잠자는 작고 귀여운 일상으로부터 발생한 사건은 무엇이든 으레 자연스럽고 천연하니까. 천사를 만나기 전까지 사랑을 몹시 구했던 서원의 송년 기도를 나누자. “저를 보살피는 신이시여. 감사의 인사를 드리옵나이다. 한 해가 저물어가고 고요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음에 더욱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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