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위 실용주의

이용욱 논설위원

정치는 ‘마이너스의 손’임에 틀림없다. 왜 좋다는 것은 다 긁어모아놓고, 쓸모없는 탱자로 만드는가. 사람이든, 가치든….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정치인은 여의도에 발을 딛기 전 자신들의 분야에서 괜찮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예컨대 보수정권 시절 논란이 됐던 많은 인사는 능력 있는 법조인들이었다.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을 막지 못했다고 비판받는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도 일 잘하는 검사였다고 한다. 검찰총장 시절 권력에 맞섰다는 이유로, ‘상식과 공정’의 상징으로 떠받들어졌던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무식이 탄로났다.

이용욱 논설위원

이용욱 논설위원

더불어민주당도 야권을 비웃을 처지는 아니다. 젊은 시절 민주화를 외치며 독재정권과 싸웠던 586들의 다수는 기득권 집단으로 전락하고도, 도덕적 우위라도 점한 양 남을 꾸짖는다. 문재인 정부에 관여한 진보 교수들은 ‘내로남불’ ‘위선’ 프레임을 여권에 씌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여권의 실패로 민주·진보의 가치마저 크게 훼손됐다는 것은 더 아쉽다. 촛불도 예외가 아니다. 촛불에 담겼던 ‘공정’ ‘나라다운 나라’에 대한 열망은 촛불정부를 자처하는 문재인 정부에서 사그라들었다. 위선, 오만, 국론분열 등이 촛불 주변에 떨어진 촛농처럼 남았을 뿐이다.

김대중 정부 이후 검찰개혁의 숙원으로 여겨졌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각종 논란과 구설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도 정치의 손때를 탔기 때문이다. 출범 이후 한 명도 기소하지 못한 무능, 이성윤 서울고검장에 대한 황제조사, 야당 정치인과 언론인들에 대한 무분별한 통신조회 등 실상은 초라하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입시비리 의혹 등을 방어하던 여권이 검찰을 견제하기 위해 준비도 안 된 공수처를 밀어붙인 결과다.

역대급 비호감이라는 이번 대선이라고 다를까. 정치의 그림자는 사상까지 오염시켰다. 이재명 민주당 후보,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앞다퉈 내세우는 실용주의가 그런 예다. 실용주의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실제 결과가 진리를 판단하는 기준이라고 주장하는 철학사상으로, 행동을 중시하며 사고나 관념의 진리성은 실험적인 검증을 통하여 객관적으로 타당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재명의 실용주의든, 윤석열의 실용주의든 이런 정의와 많이 다르다. 말바꿈과 부실을 변명하려는 미사여구나 말장난에 가깝다.

이재명 후보는 그간의 기조, 언행들과 반대되는 말들을 쏟아내면서 ‘이재명식 실용주의’라고 한다. 그가 내세우는 ‘공시가격 전면 재검토’ ‘다주택자 양도소득 중과세 유예’ 등은 이전의 국토보유세 도입 주장과 배치된다. ‘전두환의 경제성과는 인정해야 한다’는 발언은 민주당의 근본마저 부정한 것이었다. 이 후보는 “국민 행복에 필요한 일이라면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용기와 유연성이 있어야 한다”고 했지만, 표만 된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말로 들린다. 이 후보가 손쉽게 하는 사과들도 실용주의의 산물인가.

윤석열 후보는 “보수도 진보도 아닌 실사구시·실용주의 정치”를 말했지만, 도무지 실체를 알 수 없다. 감세와 규제완화 등을 이야기하면서 ‘어떻게’는 빠뜨렸다. ‘주 120시간 노동’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폈던 게 엊그제인데, 타임오프제와 노동이사제에 찬성한다고 말한다. 종잡을 수가 없다. 부실한 실력을 실용주의로 포장하려는 것 아닌가. 박근혜 정부 때 유행하던 말이 떠오른다. “많이 듣는데 실체를 알 수 없는 세 가지가 있다. ‘안철수의 새정치’ ‘박근혜의 창조경제’ ‘김정은의 속마음’.” ‘윤석열의 실용주의’를 여기에 추가하고 싶다.

이번 대선을 뒤덮은 네거티브 공방도 왜곡된 실용주의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 국민들의 마음을 끌 만한 정책과 비전을 만들어낼 능력도, 열의도 없는 여야가 상대를 깎아내려 손쉽게 표를 얻겠다는 나름의 실사구시를 추구하는 것 아닐까. 엎친 데 덮친 격, 목불인견 대선판에서 눈과 귀를 씻고 싶은 광경이 또 벌어졌다. 페미니스트 정치인이라는 신지예 전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대표가 국민의힘 선대위에 합류한 것이다. 윤 후보는 “99가지가 달라도 정권교체라는 한 가지 생각만 일치하면 손잡아야 한다”고 말했고 신지예는 “정치는 이상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바꿔 나가는 작업”이라고 했다. 최소한의 명분도, 부끄러움도 없는 양측의 해명은 왜곡되고 비틀린 실용주의의 결과물일 터다. 정치라는 마이너스의 손이 미다스의 손으로 변하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이따위 싸구려 실용주의에는 고개를 돌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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