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수자의 삶 온전히 존중되길

박한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

지난해 12월31일, 국회가 자신들의 책무를 저버리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다음 해로 미룬 그날 저녁, 국회의사당 앞에서는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2021 송년문화제가 개최되었다.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도 무지개빛으로 국회 앞을 수놓은 여러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생각해 보았다. 2021년은 나를 비롯한 성소수자에게 어떤 해였는가, 그리고 2022년은 어떤 해이길 바라는가.

박한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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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생애사 인터뷰에 참여한 적이 있다. 여러 트랜스젠더와 그 주변인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기획이었다. 그런데 2시간여 동안 진행된 인터뷰를 마치고 문득 불안감이 들었다. 내가 이야기한 내용들이 소위 ‘전형적인 트랜스젠더의 경험’과 너무 동떨어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여기서 전형적이라 함은 어릴 때부터 줄곧 성별정체성으로 괴로워했고 주변으로부터도 소외를 겪었으며, 외모 등을 성별정체성에 맞게 전환한 후에 비로소 만족감을 느끼며 생활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차별로 인해 고통을 받는 그런 삶의 경험을 말한다. 이는 트랜스젠더를 다룬 여러 매체들에서 여전히 볼 수 있는 서사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1인에 불과한 나의 이야기가 혹시 누군가에게는 혼란을 줄까 하여 이대로 인터뷰가 나가도 괜찮을지 물어보았다. 이에 대해 인터뷰어의 답은 이러했다. ‘지금까지 인터뷰한 다른 트랜스젠더가 다 같은 질문을 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람의 삶의 경험에서 어떠한 전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얼핏 비슷하게 보이는 삶들도 가까이서 살펴보면 그 안에는 수많은 역동들이 존재한다. 트랜스젠더, 성소수자 역시 마찬가지다.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아직 만연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어려움이 많지만, 그럼에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가슴이 뛰고 화가 나는 순간들도 역시 많다. 앞서의 인터뷰에서 내가 이야기한 것도 주로 후자의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왜 당시 나를 비롯해 인터뷰에 참가하는 트랜스젠더들은 불안을 느낀 것일까.

그 당시에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바로 이것이 바로 차별이 가져오는 중대한 해악이라 할 수 있다.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구조적 차별이 만연할 때 그러한 소수자 집단에 속하는 개인들은 차별로 인한 고통을 겪는 것만이 아니라, 차별을 없애기 위해 자신들이 차별당한 경험을 계속해서 증언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당장 성소수자가 무슨 차별을 받느냐며 차별금지법에서 성적지향·성별정체성을 제외해야 한다는 주장이 여당 주최 토론회에서 이야기되고, 야당 대변인이 성소수자가 사회적 약자인지를 묻는 정치권에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자. 다양한 성소수자의 삶을 온전히 존중하기는커녕 성소수자의 존재에 대해 합의를 운운하는 이들 앞에서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 결과 만들어진 차별받는 성소수자라는 전형이 다양한 성소수자의 삶의 경험을 가린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포괄적으로 차별을 예방, 구제하고 평등을 실현하는 것은 단지 개인이 겪은 차별 피해에 대한 해결을 넘어서는 것이다. 모든 개인들의 삶이 온전히 존중될 수 있도록 하는 사회, 무엇이 차별인지도 모르는 사회를 향해 내가 차별 피해자라고 소리 높여 증언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 사회, 다양한 정체성과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그냥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사회, 이것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통해 우리가 나아갈 수 있고 나아가야 하는 사회라 할 것이다.

2021년 한 해를 보내면서 곁을 떠나간 성소수자 동료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이들이 다양한 정체성을 갖고 각자의 여정을 걸어가던 한 명의 동료 시민임도 기억한다. 새해에는 이들의 삶이 온전히 추모받을 수 있기를, 그리고 더 많은 성소수자의 다양한 삶의 경험이 드러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출발점이 될 차별금지법이 지금 당장 제정되기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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