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은 늘리는 것보다 줄이는 것이 어렵다

81세 여성 환자. 당뇨, 고혈압, 고지혈증, 신부전, 빈혈, 무릎관절염, 허리디스크, 비염, 백내장. 병명만 열거하기에도 숨이 찰 정도였다. 4년 전 처음 만났을 무렵 6개의 동네 의원을 다니고 계셨다. 각 의원에서 처방받는 경구약을 모두 모아놓고 보니 진통제 종류가 4종류, 진통제와 함께 처방된 위장약도 4종류였다. 분명 신장이 안 좋은데 어찌나 드시는 약이 많은지.

몇 달에 걸쳐 약 개수를 서서히 줄여가기 시작했다. 신장에 무리가 될 만한 진통제를 다른 종류로 바꿨고, 위장약들도 대거 줄여 18개 약제가 12개가 되었다. 의료기관 방문 횟수도 줄었다.

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재택의료센터 가정의학과 전문의

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재택의료센터 가정의학과 전문의

약을 줄인 후 나는 뿌듯하였지만, 건강보험 심사와 함께 받은 메시지는 “한 환자에게 12제 이상의 다약제를 처방하였으니 특별 심사 대상으로 넣겠다”는 문구였다. 그 후로 매달 이분께 약을 처방할 때마다 똑같은 메시지를 받고 있다. 이분이 이전에 다녔던 어떤 의료기관도 이런 경고를 받은 적은 없었을 것이다. 각 의료기관에서는 3~5개씩의 약제만 처방하였으니, 18개 종류에 스물두 알의 약을 매일 드신들 다약제 처방 경고를 받는 일은 없다. 내가 이분과 4년을 지내왔으니, 약값을 줄여 아낀 건강보험재정만 계산해도 족히 100만원 이상은 될 터인데!

건강보험 심사의 포커스가 환자에 있지 않아 보니 생기는 일이다. 각 의료기관에서 어떻게 약을 처방했는지만 심사하지, 여러 의료기관을 아울러 환자를 중심에 놓고 보지 못하니, 18개 약제를 12개로 줄인 의사가 경고를 받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이분과의 4년이 매끄럽지만은 않았다. 우연히 감기약 처방을 위해 처음 들른 동네 의원. 무슨 질환을 앓고 계시는지, 무슨 약을 복용하시는지 질문하니, “뭔 놈의 질문이 꼬치꼬치 많냐”고 역정을 내시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관계는 시작되었다. “진통제를 다른 의료기관에서 처방받아 이미 드시고 있으니, 감기약에 진통제는 넣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던 것이 계기가 되어 “내가 딴 병원에서 무슨 약을 받아먹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데는 여기밖에 없어?” 하시며 두 번째 방문이 이루어졌다. 그 후로 몇 개월에 걸쳐 진통제부터 줄이기 시작했다. 바꿨는데 효과가 없어 통증이 심해졌던 때도 있었지만, 조금씩 쌓인 신뢰로 위기를 넘겼다. 진통제와 위장약이 꽤 정리된 후에야 고혈압, 당뇨약도 처방받고 싶다고 말씀하셔서, 명실공히 이분의 주치의가 될 수 있었다.

얼마 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노인의 다약제 사용관리 방안 연구보고서>를 공개하였다. 다약제를 복용하는 노인의 입원과 응급실 방문이 높아지는 결과였다. 원래도 아프니 약을 많이 드셨겠지라고 하기에는, 동반상병이나 외래 방문 횟수를 보정한 후에도 응급실 방문이 1.2~1.8배, 사망이 1.6~2.8배 높았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보고서는 노인 다약제 관리를 위해 국가 차원의 로드맵이 필요하다고 제안하였는데, 나는 이것이 ‘주치의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약은 늘리는 것보다 줄이는 것이 힘들다. 증상이나 질환에 대해 약을 처방하는 것은 쉽다. 오히려 어려운 것은, 증상이 있는데도 약을 쓰지 않고 기다려보자고 설득하거나, 꾸준히 드시던 약을 줄여보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시간도 더 많이 걸리고, 서로의 관계도 더 탄탄해야 가능한 일이다.

대통령 선거에 ‘전 국민 주치의제’가 공약으로 등장했다. 주치의가 생기면 내 삶이 뭐가 달라질까 궁금한 분들이 있다면, 18개 약제가 12개로 줄어드는 일이 가능할 것이라고, 건강보험 심사의 포커스가 의사의 행위가 아닌 ‘환자의 건강’에 맞춰질 것이라고 답하고 싶다. 진료실 안에서 우리가 쌓아 온 관계, 환자와 의사 사이의 신뢰가 제도로서 인정받게 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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