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룰 수 없는 ‘시기상조’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집행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코로나19 유행이 시작된 지 어느덧 2년, 바이러스는 우리 사회의 약한 고리를 귀신같이 들추어내고 있다. 제노포비아와 백신 불평등 같은 국제적 이슈에서부터 성소수자와 이주민에 대한 혐오와 차별, 불안정 노동자들이 처한 경제적 어려움에 이르기까지. 성벽이 하나씩 무너지더니 이제 ‘의료전달체계’까지 왔다. 사실 코로나19 유행 초기부터 최약체로 지목받았지만, 다른 곳이 먼저 포화에 휩싸이면서 용케 버텨오던 곳이기도 하다.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집행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집행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확진된 산모가 병원을 찾지 못해 결국 구급차에서 분만했다는 소식, 재택치료 중이던 환자가 격리 해제 이후에 호흡곤란을 호소하다 사망에 이르렀다는 소식, 검사 결과가 음성이라 자가격리만 하던 중에 호흡곤란 악화로 사망했다는 소식. 언론을 통해 알려진 심각한 사례들이다. 아슬아슬한 순간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보건소 직원이 게을렀거나 무책임했던 게 결코 아니다.

예컨대 기저질환이 없고 증상도 경미해서 재택치료 중이던 30대 코로나19 환자에게 갑자기 복통이 발생했다고 생각해보자. ‘코로나19 이전 시대’였다면 환자가 알아서 동네 의원이나 병원 응급실을 찾아갔겠지만, 이제 그렇게 할 수 없다. 우선 보건소에 전화를 한다. 통화 폭주, 연결이 어렵다.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비대면 진료를 제공하는 동네 의원에 연결된다. 그런데 의사가 신체검사와 복부 CT 촬영을 해봐야 알 수 있겠단다. 어쩐다? 우여곡절 끝에 지역 공공병원에서 CT 촬영 성공. 급성충수돌기염이고 응급수술이 필요하단다. 그런데 이 병원에는 외과의사, 마취과 의사가 없다. 기다리는 환자는 애가 탄다. 심각한 문제가 아니지만, 이 과정 어디에서든 시간이 지체되면 안타까운 뉴스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이런 문제를 막기 위해 정부는 신속대응 체계를 만들고 있다. 문제는 이런 체계를 다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생각지도 못한 곳에 빈틈이 있을 수 있다. 서로 합을 맞춰볼 시간과 경험이 불충분하니 삐걱거릴 가능성도 크다.

한국 사회는 그동안 주치의도 없고, 잘 짜인 전달체계도 없이 그야말로 ‘자유롭게’ 의료서비스를 이용해왔다. 당장 필요한데 마음대로 의사를 만날 수 없다고? 반드시 주치의 의뢰를 통해서만, 그것도 정해진 병원에만 갈 수 있다고? 그건 너무 불편하지! 이런 제도는 성격 급한 한국인에게 도저히 맞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제 분명하게 알게 된 것이 있다. 서로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의사와 환자 사이의 짧은 전화진료는 환자와 의사 모두의 불안을 해결해줄 수 없다는 것, 짜임새 있는 의뢰체계 없이 환자가 생길 때마다 임기응변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 말이다. 코로나19 이전에는 이런 문제들이 그저 잘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주치의 제도를 운영하는 국가들에서는 코로나19를 비롯하여 긴급한 건강 문제가 생겼을 때 상담만으로 충분한지, 처방이나 추가 검사가 필요한지, 혹은 입원이 필요한지 1차 의료팀, 주치의가 판단한다. 환자와 일면식도 없는 시·도 병상배정반이나 보건소 재택치료 관리팀이 아니고 말이다. 팬데믹 와중에도 반드시 관리해야 할 만성질환 상태를 판단하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도, 환자를 긴급하게 큰 병원에 입원시킬 때 상대편 의료진과 소통하는 것도 이들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환자의 건강에도, 의료자원의 효율적 활용에도 도움이 된다.

상병수당처럼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정책과제들이 최근 실현되고 있다. 코로나19로 문제가 극명하게 드러난 ‘덕분’이다. 주치의 제도와 의료전달체계 구축도 지난 수십년간 줄곧 ‘시기상조’였지만, 이제 현실화할 때가 됐다. 감염병 대응을 위해서든, 고령화 시대에 복잡한 만성질환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서든 말이다. 위기마다 임기응변으로 새롭게 체계를 만드는 낭비와 헛수고는 이제 제발 그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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