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은 비용이 아닌 관계의 문제다

최준영 책고집 대표

인문학 강의 때 이따금 수강생에게 질문하곤 했다. 1년 중 노숙인이 TV뉴스에 등장하는 때가 언제인지 아느냐고. 연말 혹은 크리스마스라는 대답이 주를 이루지만 답은 따로 있다. 첫 한파가 몰려올 때다. 앵커 흉내 좀 내보자. “시청자 여러분, 내일 긴급한파가 몰려온다고 합니다. 귀가를 서두르시고 내일 아침 출근길엔 두툼한 외투를 입으시기 바랍니다. 한편, 거리의 노숙인들은 긴급한파에 어떻게 대비하고 있을까요. 부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관계당국은 만전을 기해주시기 바랍니다(바로 이때, 황량한 거리에 널브러졌거나 잔뜩 몸을 움츠린 노숙인의 뒷모습이 화면에 잡힌다).”

최준영 책고집 대표

최준영 책고집 대표

몇 년 전부터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아무리 강한 한파가 몰려와도 노숙인은 더 이상 뉴스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답이 없어졌으니 질문이 성립될 리 없다. 이제 노숙인은 사건사고 뉴스에나 등장한다. 누군가 명의를 도용해 대출받고 달아났다거나, 소주 한 병 훔쳐 달아나다가 넘어졌는데 과다출혈로 죽었다거나, 누가 누구를 죽였다거나. 마침 떠오르는 뉴스가 있다. 역시 긴급한파가 몰려온 날이었다. 서울 송파의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노숙인의 주검이 발견됐다. 연속으로 4대의 차에 치여 사망했다. 뉴스는 은연 사람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4대의 차량 중 과연 몇 번째 차의 보험료가 급격하게 오를 것인가 쪽으로 흘러갔다.

각박한 현실이 TV뉴스의 온기마저 날려버렸다. 거기 정치가 영향을 미쳤음은 불문가지다. 더 이상 빈곤, 그 자체는 뉴스거리가 되지 못한다. 빈곤에 더해 사건사고가 일어나야 비로소 뉴스가 된다. 도시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서울역 대합실과 도심 거리, 한강둔치에서 노숙인들을 치워버리라고 지시했던 사람이 다시 서울시장이 되었다. 돌아온 시장은 예의 반(反)빈곤의 본색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가뜩이나 안전사각, 방역소외로 내몰린 노숙인의 진료비 예산을 삭감해 버린 거다.

20대 대통령 선거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주요 후보들의 공약과 정책을 일별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공약과 정책이 유난히 빈약하다. 더러 있는 공약도 현실성이 없거나 효과를 기대할 만한 것이 아니다. 이재명 후보의 에너지복지가 개중 돋보인다. 결국 확인한 건 대통령 후보들의 빈곤을 바라보는 인식의 빈곤뿐이다. 빈곤은 결코 정치나 경제의 관점으로 보면 안 된다. 빈곤은 인문학적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 정치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빈곤은 비용과 예산의 문제다. 그러나 인문학의 관점에서 보면 빈곤은 관계의 문제다. 빈곤을 현재 빈곤한 그들만의 문제로 보면 안 된다. 우리 모두의 문제로 인식할 때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가 풀린다.

인문학은 관계의 학문이다. 우리의 고유 사상도 ‘관계론’에 가깝다. 20세기 개발시대에 서구의 ‘존재론’이 들어오면서 우리의 고유의 관계론이 훼손됐다. 21세기는 잃어버린 관계론을 회복하는 세기가 되어야 한다. 본디 사람이라는 말도 풀어보면 ‘인간(人間), 즉 사람 사이’이다. 사이란 곧 관계다. 우리는 늘 누군가와의 사이, 즉 관계 속에 존재한다.(신영복, <강의, 나의 동양고전독법> 서문에서)

능력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다. 개인의 실패는 온전히 개인의 능력이 모자란 탓으로만 여겨진다. 가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게 어디 그런가. 개인의 실패나 가난은 사회의 구조적 문제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 사회의 건강성이 회복된다. 더 이상 ‘착한 빈민들’ 신화는 이 사회에서 발붙일 수 없어야 한다.(김만권, <새로운 가난이 온다>)

우리는 이미 최악의 최악을 경험했다. ‘이명박근혜’ 9년으로도 모자라 ‘내로남불’ 5년을 겪고 있다. 앞으론 나아질 일만 남았다. 다음 대통령은 가난을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부디 빈곤의 구조적 사슬을 끊어내 주길 바란다. 다시, 빈곤은 비용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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