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10개 만들기’ 뜨는 이유

2000년대 초 정진상 경상대 교수가 제시한 ‘국립대 통합 네트워크’는 이후 진보적 대학개혁의 패러다임이 되었다. 그는 대학 서열의 원인을 ‘학벌’로 보는데, 이로부터 ‘국립대 통합’과 ‘서울대 폐지’라는 아이디어가 도출된다. 서울대의 학벌을 ‘나눠 갖자’는 취지에서 ‘국립대 통합’이 나오고, 서울대의 학벌을 ‘타파하자’는 취지에서 ‘서울대 폐지’(학부과정)가 나온 것이다. 이 방안을 실현하는 데에는 놀랍게도 예산이 거의 들지 않는다. ‘통합’하고 ‘폐지’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진상 교수의 저서에는 재정 관련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이범 교육평론가·<문재인 이후의 교육> 저자

이범 교육평론가·<문재인 이후의 교육> 저자

그런데 이 패러다임으로는 카이스트, 포항공대, 한국예술종합학교, 성균관대 등이 어떻게 서열을 끌어올렸는지 설명하기가 불가능하다. 이런 사례들은 학벌이 대학 서열의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결과’이며, 대학 서열에 명확한 ‘물적 토대’가 있음을 시사한다. 나는 2012년부터 국립대를 그냥 통합해버리면 서울대의 자리를 연세대·고려대가 차지하게 될 것임을 지적했고, 2019년부터는 대학 서열의 근원이 ‘학벌주의’가 아니라 ‘재정 격차’임을 주장해왔다. 지난해 9월2일자 칼럼 ‘대학 서열은 돈의 서열이다’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처럼, 대학 서열의 핵심 원인은 ‘학생 1인당 투입되는 교육비’에서 비롯되는 ‘교육의 질’의 격차다. 학벌(인맥)·명성(후광효과)·위치(서울 프리미엄)는 작용하되 부차적이다.

최근의 대학 개혁안들은 ‘학벌’ 패러다임에서 ‘재정’ 패러다임으로 전환한 결과다. 첫째로 지난 2월9일 거점국립대총장협의회는 지역 거점대를 서울대와 유사한 연구중심대학으로 키울 것을 제안했다. 여기서 슬로건으로 내건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김종영 경희대 교수가 최근 펴낸 저서의 제목이기도 하다. 둘째로 지난달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지역 국립대를 “서울지역 주요 사립대 수준으로” 지원하는 공약을 발표했다. 셋째로 지난해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선 이낙연 후보는 거점국립대를 연세대·고려대 수준으로 키우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이 셋은 목표지점은 상이하지만 중요한 공통점을 보인다. 국립대의 ‘통합’을 전제하지 않으며, 학생 1인당 교육비에 근거한 구체적 소요 예산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셋 중 가장 미지근한 것은 이재명 후보의 공약이다. 지역 국립대 학생 1인당 투입되는 교육비를 연간 2100만원대로 상향할 계획을 제시했는데, 이는 서울대(4800만원대)에는 물론이요 연세대·고려대 평균치(2700만원대)나 서강대·성균관대·한양대 평균치(2300만원대)에도 못 미친다. 중앙대·경희대·외국어대·서울시립대 평균치(1500만원대)보다는 높지만, 서울 소재 대학들에 얹어지는 프리미엄을 고려하면 수험생들의 선호도는 이들 대학보다 낮을 수도 있다. 지금과 크게 달라지기 어려운 것이다.

대안은?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슬로건으로 삼되, 임기 내 목표로 이낙연안(거점국립대 학생 1인당 교육비 2700만원대로 상향) 정도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강력한 바이럴 마케팅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고, 거점국립대 총장들에게 채택되어 추진력을 얻고 있다. 서울대와 똑같은 레벨에 오르지 못한다 할지라도 대학 간의 격차를 줄이고 학생들이 ‘가고 싶어하는’ 대학을 늘리는 것은 대입 경쟁을 줄일 수 있는 계기다.

몇 가지 보완점을 언급한다. 첫째로 연구중심대학의 급증은 국가 R&D 시스템 전체의 상당한 변화를 내포하는데 이에 대한 검토가 부족하다. 둘째로 비수도권 대학생들이 취업 준비에 불리함을 고려하여 대학 교육의 고급화와 효과적인 취업 지원 프로그램을 결합해야 한다. 셋째로 이 방안이 본격적으로 실현 궤도에 오를 경우, 위기감을 느낀 서울지역 주요 사립대들이 공공성과 반대 방향으로 맹렬한 진화를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 김종영 교수는 UC(캘리포니아대학) 시스템을 예로 들며 사립대의 반작용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데, 그는 미국 대학체제의 핵심적 특징을 간과하고 있다. UC버클리의 연간 등록금은 1만4000달러(주내 거주자 기준)인데 인접한 스탠퍼드대는 5만6000달러로, 4년간 재학하면 차액이 무려 2억원에 달한다. 주립대와 사립대 사이에 엄청난 등록금 장벽이 존재하며 이로 인해 사실상 ‘이중 리그’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반면 한국의 사립대는 국립대와 더불어 ‘단일 리그’ 안에 있는 플레이어들이다. 이들이 계속 단일 리그 안에 머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파격적 재정지원과 학생선발권을 교환하는 사회적 대타협을 구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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