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구용 전남대·광주시민자유대학 교수

가위스토리, 멋진 이름이다. 5년 전 이사한 마을 미장원이다. 내 또래 헤어 디자이너 한 분이 운영하는 가게다. 정성으로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아내면서 두피와 모발 건강까지 살피는 미용을 하니 그만큼 많은 시간이 든다. 나에겐 힘든 시간이다. 다행히 미용사님이 전해주는 세상 이야기가 새롭고 흥미롭다. 첫 만남 이후 머리 스타일만큼이나 그녀와의 사회적 신뢰와 연대가 쌓였다.

박구용 전남대·광주시민자유대학 교수

박구용 전남대·광주시민자유대학 교수

3월9일, 사전투표를 했기에 미용 예약을 했다. 상황 진단도 들어보고 싶었다. 어쩌다 조금 늦어져 전화를 드렸다. 그런데 마음의 기도가 필요해 집에 들어갔다며 선거 끝나면 오라고 한다. 간절함이 느껴졌다. 다음날 아침에야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녀로부터 문자가 왔다.

“교수님, 너무 슬프고 화가 나서 눈물이 납니다. 우리 국민들의 집단 지성을 믿었는데 이렇듯 나라의 미래보다 본인들의 현재가 중요한 듯합니다. 너무 화가 납니다.”

뭐라고 답장을 해야 할까? 여기저기서 비슷한 문자가 송곳처럼 날아왔다. 신문사, 방송사 기자들 전화도 울린다. 지금 호남 사람들의 마음을 알려 달란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는 것이 없어서다. 상황을 이해할 힘이 내게는 없었다. 이해를 못하니 해석도 할 수 없다. 내 마음이 공중 분해된 상황에서 다른 이들의 마음까지 챙기기도 어려웠다. 답장도 못했다. 지금 이 순간 정신을 붙잡고 미용사님에게 이 칼럼으로 답장을 대신한다.

사표는 누가 만든 말일까
대부분 나라선 ‘상실된 표’로 쓴다
그건 민주주의와 거리 먼 일본말
우리말로 사표는 없다

모든 표는 그 나라의 심장이다

“사장님, 언제 미용실에 가도 될까요? 저는 이제 수업도 하고 책도 읽고 있습니다. 사장님도 미용실에 계시죠? 터무니없는 말로 사장님 괴롭히는 손님들도 몇은 다녀갔지요? 마음이 안 잡혀도 일은 해야겠지요? 그래서 쓰는 칼럼이니 읽어보시고 곧 찾아가면 평가해 주세요.”

선거, 특히 대통령 선거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①국가를 대표하고 운영하는 최고 책임자이자 권력자를 선출하는 것인가? ②주권자인 국민이 나라의 미래에 대한 의견과 의지를 모으면서 합의한 것을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기는 대리인을 선출하는 것인가? 둘 다 맞다. ①은 결과에, ②는 과정에 초점이 있다. 그런데 나쁜 정치는 ①에만 몰입한 나머지 ②를 무시한다.

의원내각제는 국민의 다양한 의견과 의지를 그대로 반영하여 권력을 분산한다. 소수정당도 합당한 권력을 누리는 다당제가 실질적으로 가능하다. 반면 대통령제는 다양한 의견과 의지를 두 개의 거대한 프레임으로 수렴시키고 그중 하나에 배타적 우선성을 부여한다. 다원성을 이원성으로 강제 전환하는 선거 과정에서 충돌이 격화된다. 이런 약점보다 강점이 더 크다.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시민들은 정치적 의제에 따라 대립하는 두 가지 의견의 차이에 주목하기 쉽고 그만큼 주권자로서 뚜렷한 정치적 의식을 가질 수 있다. 선거 과정에서 많은 국민들이 중요 의제에 대해 서로 공부하고 의견도 나눌 수 있다. 다원성의 토대 위에 자연스럽게 중첩적 합의가 형성되고, 그 결과가 선거에 반영된다. 그렇다면 이번 대선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중첩적 합의는 무엇일까? 어떤 합의로 선거 결과를 설명할 수 있는가? 정권교체? 이 프레임을 내세운 이들로부터 바꾸고 싶은 정치가 무엇인지 물어보자.

‘친미, 반중 안보·경제 체계 구축’ ‘북한과는 적대, 일본과는 교류 강화’ ‘노동조합과 시민단체는 통제, 검찰권과 사법정의는 강화’ ‘친환경 미래 에너지는 축소, 원자력은 강화’ ‘여성가족부는 폐지, 저임금 노동시간은 연장’. 이런 것들이 정권교체를 바랐던 이들의 중첩적 합의사항인가?

가끔 국민의 정치 과몰입을 꾸짖는 언론이 많다. 실제로 우리의 정치 몰입감은 세계 최강이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주권을 빼앗긴 경험은 많지만 결코 정신적 주권, 곧 자유를 빼앗긴 적 없는 선조들의 역사가 있어서다. 두 번째 이유는 언론의 부재다. 이 나라의 언론은 주권자의 의지를 대변하고 변론하는 것이 아니라 왜곡하고 조작한다. 특히 이번 대선에서 주요 언론들은 국민들의 의지형성 과정을 전달하기보다 오히려 교묘하게 조작했다. 여론조사가 그 실증적 예다. 저들에게 이재명 지지 표는 지금 이 순간 사표일 뿐이다.

사표. 죽을 사, 투표 표. 죽은 표! 낙선한 후보자를 지지한 표는 죽었다! 누가 만든 말일까? 대부분의 나라에선 ‘상실된 표’란 말을 쓴다. 승리하지 못한 주권자의 의견과 의지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이 말은 도대체 어디서 온 말일까?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나라, 일본의 말이다. 우리말로 사표는 없다.

모든 표는 그 나라의 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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