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대선의 아이러니

정제혁 사회부장

50대 초반인 또래 지인에게서 들은 얘기다. 대선 투표일을 앞두고 20대 초반인 아들과 마주앉았는데, 이재명을 찍어야 한다고 설득하자 아들이 그러마라고 하면서도 영 마뜩지 않은 표정을 짓더라는 것이다. 그 아들은 처음에는 홍준표를, 다음에는 안철수를 지지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지난해부터 여러 명에게서 들었다. 전하는 이들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했다. ‘요즘 젊은 애들은 참’ 하며 개탄하거나 어이가 없다는 식이었다.

정제혁 사회부장

정제혁 사회부장

문득 십수년 전 보수논객 조갑제가 주창한 ‘어버이 역할론’이 떠올랐다. 휴대전화와 인터넷 커뮤니티로 무장한 젊은 세대가 비주류 정치인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든 게 20년 전이다. 당시 기성세대가 느꼈을 당혹감과 허탈감이 어쩌면 지금 50대가 느끼는 것과 비슷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50대는 과거 6·25 세대나 산업화 세대처럼 기성세대가 되었구나.’ 이 엄연한 현실을 새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대론의 대두는 정치적·사회적 살부(殺父) 절차이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가 보여주듯 과거 기성세대는 윽박지르고 명령하는 ‘권위주의적 아버지’로 표상됐다. 거기에 대고 “대한민국 학교 다 ×까라 그래”라며 대든 게 지금의 50대다. 지금의 20대에게 50대는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도덕주의적 아버지’에 가까울 것이다. 둘의 공통점은 귀를 막고 제 생각을 강요한다는 점이다. 주먹으로 때리느냐, 말로 때리느냐가 다를 뿐이다.

이 틈새를 집요하게 파고든 게 이준석이다. 이른바 50대 포위론이 그것이다.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윤석열이었지만 선거 캠페인을 지배한 건 이준석이다. 여성과 남성을, 20대와 50대를, 친미와 친중을, 친북과 반북을 거침없이 갈라쳤다. 그의 언어는 당 공약에, 윤석열의 발언에 고스란히 투영됐다. 일종의 복화술을 보는 것 같았다. 여성가족부 폐지도 이준석의 의제였다. 윤석열이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여성가족부 폐지’ 7자 공약을 올렸을 때 눈앞에 아른거린 것 역시 이준석의 해사한 얼굴이었다.

비유하자면 이준석은 태블릿PC에 그려진 도표, 지지율 등락곡선에 따라 정치적 위치를 잡는다. 선거 당일 지상파 3사의 출구조사 결과가 예상과 다르게 나오자 당황하는 모습은 마치 공식대로 수학 문제를 풀었는데 오답이 나오자 어쩔 줄 몰라하는 학생 같았다. 그에게 정치인의 소명의식과 실존적 고뇌 따위는 촌스럽고 시대에 뒤떨어진 공리공론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모든 것은 게임이고, 게임에선 이겨야 한다. 이기는 것은 선이요, 지는 것은 악이다.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선거에서 이기기보다는 선거에서 이기려고 가치의 우선순위를 배치한다. 정치가 궁극적으로 추구할 것은 공동체의 통합이지만 이기기 위해서라면 분열과 혐오의 정치를 거리낌없이 동원한다. ‘한국판 트럼프’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이준석의 남녀 갈라치기와 세대 포위론이 온전히 먹혔다면 지난 대선은 ‘이준석의, 이준석에 의한’ 대선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준석의 혐오 정치가 20대 여성 유권자의 집단적 정체성을 흔들어 깨웠다. 그와 함께 세대 포위론도 속절없이 무너졌다. 이준석의 ‘복주머니’는 하마터면 ‘재앙주머니’가 될 뻔했다.

젠더 이슈를 투표 기준으로 삼은 20대 여성 유권자의 등장은 그 자체로 한국 정치사의 일대 사건이다. 이렇게 한 번 자각된 집단적 정체성, 여성혐오에 편승한 정치를 보란 듯이 표로 응징한 집단적 힘의 기억과 효능감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이준석은 20대 여성의 목소리를 누르려고 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당장 국회 과반 의석을 점한 더불어민주당은 여가부 폐지에 제동을 걸 정치적 의무와 동력이 생겼다. 난제를 받은 건 집권당이 될 국민의힘이다.

최근 한국 정치는 반전의 연속이었다. 2016년 촛불은 문재인 정부를 탄생시켰지만 촛불을 거쳐 고양된 정치적·도덕적 기준은 그대로 문재인 정부를 평가하는 잣대가 됐고, 그 결과가 정권교체로 나타났다. 촛불의 요구는 소박하게 말해 ‘내로남불하지 마라’ ‘여야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혁파하라’ ‘부패와 특권을 용납하지 마라’ ‘절차적 정의를 지키라’는 것일 텐데, 이 기준은 윤석열 정부에도 가차없이 적용될 것이다. 촛불정신이라는 ‘다모클레스의 칼’이 항시 머리 위에 매달려 있는 셈이다. 인수위 구성과 첫 조각이 시험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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