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녀와 변강쇠, 그리고 19세기 하층민의 삶

소진형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판소리계 고전소설인 <변강쇠전>은 남녀 간의 욕망을 다룬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한 면이 있음은 분명 사실이지만, 소설이 집필된 19세기 조선이라는 배경을 고려하면 조금 다른 읽기도 가능하다. 당시 조선 사회는 계속되는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해 피폐해졌다. 재해로 몇십만명씩 사망했던 참혹한 사회상은 여러 자료에서 확인된다. <변강쇠전>은 통계로만은 쉽게 감이 오지 않는, 당대 하층민들 삶의 고통의 깊이가 어떠했는지 조금이나마 엿보게 해주는 소설이기도 하다.

소진형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소진형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변강쇠전>의 별칭은 <가루지기전> 혹은 <횡부가(橫負歌)>이다. 가루지기나 횡부는 짊어진 송장을 의미하며, 이 별칭들은 이 이야기가 사랑이나 해학적 로맨스가 아닌 비극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실제로 <변강쇠전>은 죽음의 서사라 할 수 있는데, 그 전반부는 옹녀의 청상살로 인한 남자들의 죽음을, 후반부는 변강쇠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는 또 다른 죽음의 연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비극은 청상살, 즉 그녀와 접촉하는 남자들은 다 죽을 것이라는 저주와 같은 옹녀의 운명으로부터 시작한다. 평안도 월경촌에 사는 옹녀는 “서시와 포사라도 따를 수가 없”는 미인이지만, 그녀와 만나는 남자는 모두 죽는다. 여섯 번의 결혼에서 얻은 남편들은 물론, 그녀와 접촉하기만 해도 남자들은 청상살을 맞아 죽음에 이르게 된다. 평안도와 황해도 남자들의 대부분이 죽어 나가면서 여자들은 옹녀를 쫓아내기로 결심한다. <변강쇠전>의 이야기는 쫓겨난 옹녀가 동백기름을 머리에 바르고 산호 비녀 찔러 잔뜩 꾸민 뒤 꿋꿋하게 삼남을 향해 내려가면서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옹녀는 개성에서 10여리 떨어진 골짜기인 청석관에서 또 다른 주인공인 변강쇠를 만난다. 두사람은 서로 과부와 홀아비인 걸 확인하고 같이 살 것을 약조한다. 둘의 시작은 좋았다. 옹녀의 청상살은 변강쇠와 맺어진 이후 끝나는 듯했다. 변강쇠는 물론, 이후 옹녀와 만나고 접촉하는 남자들도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변강쇠와 옹녀가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유랑민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 자들의 행복을 위해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기 때문이다.

옹녀는 결혼 후 생활을 위해 들병장사, 막장사, 안 해본 장사가 없지만, 변강쇠는 옹녀가 돈을 모으는 족족 “낮이면 잠을 자고 밤이면 배만 타”고, 도박, 싸움, 술먹기만 일삼으며 탕진한다. 왜 변강쇠는 옹녀가 모은 돈을 다 써버렸던 것일까. 조선의 19세기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극심해진, 성실함이 대가로 돌아오지 않는 피폐한 시대였다. <변강쇠전>의 배경이 19세기라고 가정한다면, 그의 불성실함은 절망의 세계에 살고 있는 독자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른다.

절망에 빠져 죽음을 맞이하는 변강쇠가 저주하는 대상은 국가도, 체제도 아닌, 바로 옹녀다. 그의 저주로 다시금 만나는 남자마다 죽어 나가게 된 옹녀는 작은 미래조차 꿈꿀 수 없게 된다. 옹녀는 미인임에도 기생이나 부자의 첩이 되지 않고 장사를 하며 자립하고자 하는 인물이다. 남편이라는 울타리가 없이 경제적으로 자립하고자 하는 하층민 여성이 겪어야 할 폭력을 상상해보면, 변강쇠의 유언은 무서운 저주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을 그러한 처지로 다시 밀어 넣은 사람이 다름 아닌 자신을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이야기가 비극인 이유이다.

결말에서 옹녀는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간신히 저주를 풀어낸다. 하지만 그 이후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되었는지에 관해 <변강쇠전>은 침묵한다. 옹녀의 행방이 묘연해지는 것으로 끝나는 <변강쇠전>에는 신분상승에 성공했다는 판타지나 가족에 대한 해피엔딩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이야기는 하층민들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어떻게 견뎌 나갔는지에 대한 그로테스크한 보고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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