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경과 점령군, 그리고 반면교사

이용욱 논설위원

김종인 전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은 신랄한 인물평으로도 유명하다. 문재인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 안철수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장에 대해 역량이 부족하거나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당연히 주관이 개입됐겠지만, 보는 눈이 있는 김 전 위원장인지라 설득력 있는 평가로 들렸다. 그런 김 전 위원장이 최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에 대해 “모든 것이 쉽게 될 것같이 (하는) 인상이 있다”며 “대통령에 당선되면 황홀감에서 벗어나는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린다. 황홀경에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내지 않는 것이 성공하는 대통령의 첩경”이라고 했다. 청와대 이전 논란을 두고는 ‘정력낭비’라고 했다. 황홀경·황홀감·정력, 에두르지 않는 표현에 놀랐다. 총괄선대위원장에서 중도하차하는 등 두 사람의 편치 않은 관계를 감안해도 발언이 자극적이었다. 윤 당선인의 성공을 빈다고 했지만, 행간에 회의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이용욱 논설위원

이용욱 논설위원

윤 당선인의 행보를 보면 권력에 취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통령 집무실의 국방부 이전을 전광석화처럼 발표한 게 단적인 예이다. 진보·보수 진영 모두에서 신중론이 나왔지만, 지도자의 결단을 강조하며 “청와대에서 업무를 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전 비용을 확보하는 데는 현 정부의 협조가 필요한데, 상의 없이 발표했다가 청와대와 얼굴을 붉혔다. 반대 여론에도 여성가족부 폐지는 여전히 밀어붙일 태세다.

인수위라고 다를까. 점령군 논란은 날로 커진다. ‘윤핵관’인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은 라디오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 사면을 문 대통령에게 요구하고, 이씨와 김경수 전 경남지사 사면을 함께 논의할 수 있다고 했다. 뇌물수수·비자금 횡령 등을 저지르고도 반성하지 않는 이씨를 사면할 명분도 없을뿐더러, 정치 흥정을 공개 제안한 것에 기가 찼다. 임기가 절반 이상 남은 김오수 검찰총장에게 스스로 거취를 결정하라며 사퇴를 압박한 것도 명백한 갑질이다. 인수위 회의실에는 윤 당선인이 직접 쓴 ‘겸손하게 국민의 뜻을 받들겠습니다’라는 백드롭이 걸려 있지만, 윤 당선인과 인수위 관계자들의 언행에서 겸손은 찾아보기 힘들다. ‘노란 싹수’만 보인다.

그런데, 윤 당선인 하면 데칼코마니처럼 따라붙는 사람이 있다. 이명박이다. 당장 이씨와 가까운 사람들이 윤 당선인 주변에 포진했다. 윤핵관인 장제원·권성동 의원은 대표적인 친이명박계이며, 김은혜 대변인과 김태효 인수위원은 각각 이명박 청와대의 대변인과 대외전략기획관을 지냈다. 윤 당선인 본인도 대선 과정에서 ‘4대강 사업’ 복원을 공언, 자신과 이명박의 이미지를 겹쳐지게 했다. 그러다보니 대통령실 이전을 4대강에 빗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윤 당선인이 강조한 지도자의 결단은 이씨의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문제는 이명박 시절이 아름답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씨는 2007년 대선에서 500만표 차로 이겼지만, 투표율은 역대 최저인 63%였다. 자신을 뽑은 유권자보다 기권한 사람이 더 많았음에도 이씨는 온 국민 지지를 다 받은 양 역주행했다. 4대강 사업과 종합편성채널 선정 등을 밀어붙였고, 정치적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무현 전 대통령 주변을 수사했다. 노 전 대통령의 비극적 선택 이후 우리 사회는 반으로 갈라졌고, 후유증은 치유되지 않고 있다. 국민 다수가 시급한 과제로 통합을 꼽을 정도니, 이씨의 정치보복이 끼친 해악은 상당히 크다.

이 때문에 윤 당선인은 이명박과 닮았다는 말을 흘려듣지 말아야 한다. 우선 윤 당선인은 자신의 정치적 자산이 많지 않다는 점을 새겨야 한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정권교체론은 50%를 넘겼음에도, 윤 당선인은 역대 최소인 0.73% 차이로 이겼다. 이씨처럼 독주했다가는 역풍을 맞을 가능성이 크다. 윤 당선인의 행보에 대해 화끈한 리더십이라고 추켜올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친이계들이 윤 당선인의 뒤에서 한풀이를 노릴 수 있겠지만 휘둘려서는 안 된다. 이명박을 닮을 게 아니라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

‘눈치가 보인다’라는 말은 영어로 풀면 ‘wear out my welcome’이다. 직역하면 ‘나에 대한 환영이 닳아 없어진다’는 것인데, 역대 정권의 흥망성쇠를 지켜보면서 이 표현을 떠올리곤 했다. 어떤 정부든 시간이 흐를수록 권력이 닳아 없어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다만 국정수행 평가에 따라 닳는 속도와 정치적 유산에 대한 평가는 정권별로 제각각이었다. 곱게 해질 것인가, 누더기가 될 것인가. 윤 당선인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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