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체인가 고체인가

임두원 국립과천과학관 연구관

예전에 작은 텃밭을 가꾼 적이 있습니다. 주기적으로 비료도 주고 잡초도 뽑고 물도 주면서 정성스럽게 가꾸었죠. 하지만 이내 곧 귀찮은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재미있는 취미에서 지겨운 노동이 된 것입니다. 그래도 한 해 정도는 농사를 잘 지어서 꽤 괜찮은 수확을 거둘 수 있었는데, 중간에 포기할 뻔한 저를 그래도 밭으로 부른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텃밭 옆의 한 작은 음식점. 그곳의 도토리묵 무침은 그 맛이 정말 일품이었는데, 저는 그걸 먹는 재미로 텃밭에 나갔던 것입니다.

임두원 국립과천과학관 연구관

임두원 국립과천과학관 연구관

오늘은 그때를 회상하며 도토리묵을 한번 만들어 볼까 합니다. 만드는 방법은 매우 간단합니다. 도토리 가루와 물을 적당한 비율로 섞어 반죽한 후 끓이면 매우 걸쭉한 상태가 되는데 이를 그릇에 부어 식히면 도토리묵이 완성되죠. 도토리묵은 대부분이 물이어서 말랑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고체처럼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수분이 많아 먹기 수월하면서도 잘 상하지 않으니 예로부터 먼 길 떠나는 나그네에게 유용한 음식이었다고 합니다.

도토리의 주성분은 전분입니다. 전분은 탄수화물의 일종으로 포도당이라 불리는 작은 물질들이 수천, 수만개 연결되어 만들어지는 마치 긴 실과 같은 모양의 물질입니다. 밀, 고구마, 감자 등에도 많이 들어 있죠. 그런데 전분은 호화라고 하는 매우 특이한 반응을 일으킵니다. 전분에 물을 첨가하고 가열하면 끈적한 상태로 바뀌는 것인데, 탕이나 소스의 점도를 높이기 위해 전분을 추가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걸쭉한 상태는 여전히 액체에 가깝습니다. 모양도 일정하지 않고 흘러내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물과 같은 완전한 액체는 아니니 과학자들은 이러한 상태를 졸(sol)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고체가 되기 전 단계라 할 수 있겠네요. 전분을 구성하는 긴 실과 같은 모양의 물질들이 물에서 풀어지면서 끈적한 점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토리묵은 이와는 조금 다릅니다. 처음에는 끈적한 상태였다가 식으면서 점차 고체와 비슷한 상태로 되기 때문이죠. 도토리의 전분은 특이하게도 길게 풀어진 실과 같은 물질들이 서로 엉키는 과정에서 다른 전분에 비해 더 단단한 구조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 구조 안으로 물이 갇혀버리게 되죠. 이러한 상태를 겔(gel)이라 부릅니다. 졸의 상태보다는 더 고체에 가까운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두부가 만들어지는 과정도 이와 유사합니다. 콩을 구성하는 단백질들이 엉키면서 물을 가두고 있는 겔과 같은 상태가 됩니다. 물론 이때 간수라 불리는 물질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간수가 있어야 단백질들이 더 견고하게 엉키기 때문이죠.

도토리묵이 식으면서 굳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건축가가 된 듯한 느낌이 듭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기다란 물질들을 이리저리 묶어 견고한 집을 짓고 있는 것이죠. 그 안에 들어간 물분자들은 대단히 만족했는지 나올 생각이 없습니다. 이처럼 과학을 알면 요리에 상상력이 더해지기도 하니 더 재밌게 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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