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는 우리가 만든다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사회 공동체 일부가 되기 위해선
소통과 함께 이동권은 필수요소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장애는 극복 못할 고난일 수 있고
그저 일상의 일부일 수도 있다

‘육체적 장애인이 없는 세계가 있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킴 닐슨이 <장애의 역사>에서 밝히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럽인들이 도착하기 전 북아메리카의 토착민들의 세계다. 물론 그곳에도 다양한, 서로 상이한 능력을 가진 몸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들은 몸에 있는 장애를 심각한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몸과 영혼이 조화롭기만 하다면 맹인이든 농인이든 제대로 걷지를 못하든 상관없었다. 그래서일까. 이들 토착민들의 언어에는 육체적 ‘장애’에 해당하는 단어 자체가 없었다.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오히려 그들에게 진정한 장애는 사회적 관계의 단절에서 왔다. 누군가가 공동체와 적절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거나 연결고리가 약한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이 더 큰 문제였다. 그 누구라도 공동체와 관계를 맺고 그 속에서 잘 살아가고 있다면, 육체에 있는 다름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농인 아이가 북아메리카 토착민 부족에서 태어났다면, 그 아이는 성장 과정에서 거의 대부분의 경우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소통할 수 있었고, 격리되거나 배제되지 않았다”. 실제 유럽인들의 기록에도 남아 있듯이 토착민들 사이에서 수어가 널리 쓰였던 이유다. ‘대평원 토착민 수어’ 같은 경우엔 무역이나 정치협상뿐만 아니라 사랑의 언어로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1984년 김순석씨는 ‘서울의 거리 곳곳에 널린 턱을 없애달라’는 유서를 서울시장에게 남기고 세상을 등졌다. 다섯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았지만 금은세공공장 책임자 자리까지 올랐고, 스물아홉에 당한 교통사고 때문에 두 다리에 철심을 박고도 남대문시장에 자신이 만든 물건을 납품하며 좌절하지 않던 순석씨였다. 그런데 거리 곳곳에 널린 ‘턱’은 도저히 스스로 넘을 수 없었다. 그 턱을 넘지 못해 도움을 청해야 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왜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지나는 행인의 허리춤을 붙잡고 도움을 호소해야만 합니까?” 그가 남긴 유서의 한 대목이다. 서울시 거리의 턱이 사라지게 된 계기다.

40년이 지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지하철 출퇴근 시간에 벌인 이동권 시위가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야당의 대표는 ‘전장연은 서울시민을 볼모 삼아 무리한 요구를 할 수 있다는 아집을 버려야 한다’는 메시지를 시작으로 심지어 ‘비문명적’이라는 비난의 메시지를 연신 퍼부었다. 그의 말들을 신호탄으로 장애인들의 이동권 시위에 대한 비난과 혐오 발언이 쏟아졌다. 이동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정치의 과오에 대해 반성하는 대신 시민들을 편 갈라 싸움을 붙인 셈이다.

북아메리카의 토착민들과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이동권 시위 사태는 다음의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장애는 한 정치공동체를 이루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북아메리카 토착민들에게 문제는 몸에 있는 장애가 아니라 누구라도 ‘공동체의 일부’가 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래서 그들은 청인과 농인 모두 일상생활에서 수어를 널리 사용했다. 소통이 삶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 땅의 농인들은 자동차 경적 소리를 듣지 못해 비키지 못했다가 멱살을 잡힌다. 경찰에 억울함을 하소연하려다 경찰의 몸을 손으로 만졌다고 공무집행방해로 입건이 되는 일도 흔하다.

소통과 함께 이동권은 공동체의 일부가 되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다. 안전하고 자유로운 이동의 자유가 보장돼야 기초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각종 문화생활과 여가생활도 누릴 수 있다. 이동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고립될 수밖에 없고 구성원으로서 공동체와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된다. 북아메리카 토착민의 기준에서 보자면, 이런 고립이야말로 진정한 장애이며 공동체가 개입하여 반드시 교정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장애인이 왜 밖을 돌아다녀!”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들이 이동할 때 흔히 듣는 핀잔이다. 어쩌면 거침없이 내뱉는 이 한마디가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잘 보여주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장애를 향한 혐오 표현은 숨어 있지도 않고 너무나 노골적이고 일상적이라 심지어 아무렇지도 않게 들리기도 한다. 그런데 그 장애인 수가 2020년 기준으로 263만3000명에 이른다. 우리 국민 20명 중 1명이 장애인이다. 게다가 장애인 10명 중 9명은 후천적이다.

장애는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장애는 극복할 수 없는 고난이 될 수도, 그저 일상의 일부일 수도 있다. ‘장애는 우리가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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