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에서 밝히는 연등

이제 완연한 봄이다. 날씨는 화창하고, 산기슭에 피어난 꽃들도 제각각 자태를 뽐내고 있다. 새소리도 제법 크게 들려오고, 골짜기를 타고 올라온 바람은 풍경에 걸려 맑고 그윽한 소리를 만들어 낸다. 겨우내 앙상했던 나무들도 하루가 다르게 우거지고 짙게 푸르러만 간다. 가야산의 계곡물 소리가 귓가에 가깝게 들릴 때쯤이면 봄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짐작한다. 매번 찾아온 봄이고 따사로움이지만 올봄은 어딘가 느낌이 다르다. 코로나19 감염병이 그 끝을 다해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도 조심스럽게 마스크를 벗어 나들이를 시작하고 그렇게 오랫동안 되뇌었던 그 ‘일상 회복’으로 들어서고 있다. 우리는 그 어둡고 긴 터널을 이제 막 벗어나고 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그토록 기다려 왔던 밝음이고 빛이건만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마음속은 아직 어둡기만 하다. 다시 일터로, 학교로, 직장으로 나서고,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그간의 피해와 후유증은 여전히 감당해야 할 몫으로 남아 있다. 마음속 깊은 어둠까지 환하게 밝히는 등불을 켤 수 있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보일 스님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보일 스님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엊그제는 분주했던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간만에 산중에서 망중한을 즐겼다. 산중에선 어른 스님들께서 종종 ‘아무리 좋은 일도 일 없는 것만 못하다’는 말씀을 염불하듯 하신다. 그 ‘일 없음’을 느껴보고자 경내를 이리저리 포행하다가, 어느 꼬마 아이가 아빠 손에 들려져서 연등을 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깔깔거리며, 뭐라 적었는지 모를 가족의 소원지를 고사리손으로 연등 끝에 매달고 있었다. 아래서는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와 아빠가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독신 수행하는 비구의 눈에도 가정의 행복함과 단란함이 그대로 전해지니 말 그대로 행복하고 평화로운 정경이었다. 오월의 밤을 밝히는 연등은 단순히 불교 전통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연말에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면서 누구나 기뻐하고 설레는 것과 마찬가지다. 산사에서 밝히는 연등은 도심 속에서 빛나는 연등과는 또 다른 감흥을 준다. 어두운 산속에서 밤하늘의 별빛을 배경으로 연등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하늘의 별들이 바로 눈앞에 쏟아져 내린 듯하다.

연등의 유래는 이천오백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우경(賢愚經)>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법문을 하실 때마다 수많은 사람이 가르침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는데, 사람들은 등불을 켜는 것이 복이 된다고 믿고 앞다투어 등불을 밝혔다고 한다. 하지만 그중에 홀로 가난하게 구걸로 삶을 연명하는 난타라는 이름의 노파가 있었다. 난타는 부처님께 등불을 공양하고 싶었지만 가진 것이라곤 구걸로 받은 한 푼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난타는 등을 밝힐 기름을 사러 갔는데, 기름집 주인이 딱한 사정을 듣고 기름을 두 배나 더 주어서 겨우 등불 하나를 장만할 수 있었다. 난타는 기쁜 마음으로 부처님과 스님들이 수행하는 기원정사 한쪽에 등불을 밝힐 수 있었다. 그러곤 서원을 세우기를 “저는 지금 가난하여 작은 등불이나마 부처님께 공양을 올립니다. 이게 공덕이 된다면, 다음 생에서라도 제가 지혜를 얻어 모든 중생의 어둠을 없어지게 하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 놀라운 일은 이후에 벌어졌다. 밤중에 세찬 바람이 갑자기 불어 다른 모든 등불이 꺼졌음에도 유독 하나의 등불만 온전히 밝게 빛났는데 그것은 난타가 공양 올린 기름 등불이었다. 제자들이 이상히 여겨 이 불이 꺼지지 않는 이유를 부처님께 묻자,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큰마음을 낸 사람이 보시한 물건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셨다. 같은 등불을 밝히더라도 아니 비록 초라한 등불일지라도, 그것이 어두운 세상을 밝히겠다는 한 생각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올 부처님오신날에 다는 연등은 서로가 서로에게 지난 시간 잘 견뎌냈다는 격려와 축하의 등불이 되었으면 한다. 물론 나 자신과 가족의 행복과 소원도 좋지만, 조금이라도 주변과 세상을 위한 마음으로 내건 연등은 더 밝고 따뜻할 것이다. 지금 산사에서든, 도심 대로변에서든 아름답게 켜진 연등은 부처님만을 위해서도 아니고 불자들만을 위해서도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한 위로와 희망의 등불이다. 그간 서로 잘 견뎌주어 고맙고, 의지가 되어줘서 고맙고, 이제 다시 예전처럼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음에 대한 축하의 등불이다. 그것은 마치 난타가 정성스레 밝힌 기름 등불처럼 영원히 꺼지질 않을 우리 마음의 등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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