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꾸러미, 지역 선순환으로 되살리자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사례를 중심으로’라는 부제가 붙는 연구 논문의 주제도 유행을 탄다. 저 ‘○○’에 들어가려면 연구자의 관심도도 중요하고 사례가 풍부해 현장 접근도 쉬워야 한다. 사회과학 논문에서 활발하게 다뤄지던 사례가 ‘로컬푸드’ 테마였다. 비슷한 연구방식에 지역만 살짝 바꾼 논문들이 수두룩하다. 논문 검색 포털에 검색어로 ‘로컬푸드’를 넣으면 500편이 넘는 논문이 나온다. 로컬푸드 하면 으레 농협 하나로마트 한편에 설치되어 있는 편백나무 매대를 떠올리지만, 10년 전만 해도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사례는 ‘제철꾸러미’ 방식이었다. 로컬푸드 유형 중에서는 직매장에서 판매하는 방식도 있지만, 제철꾸러미는 제철에 나오는 다양한 농산물과 장아찌나 김치와 같은 소박한 가공식품으로 구성해 소비자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 혹은 격주로 한 번 정도 정기적으로 택배로 보내는 방식이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제철꾸러미 사업을 이끈 주체들은 여성농민들이다. 그중에서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의 여성 농민운동가들이 ‘언니네 텃밭’이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이어왔다. 경제작물이라 부르는 주요작물재배 외에 가족들의 식생활을 꾸려나가기 위해 집 인근에서 짓는 텃밭 농사는 자연스럽게 농사의 다양성이 따라온다. 여기에 식구들 입맛에 맞는 종자를 갈무리해 토종 농사를 이어오면서 경제성은 없어도 그 다양한 맛을 지켜왔고, 제철꾸러미에만 특별히(!) 넣어준다.

글로벌 식품체계에 대한 저항이니 대안이니 하는 논문 스타일의 거창한 의미를 갖다 붙이지 않아도 여성농민과 텃밭 중심의 제철꾸러미 사업은 그 자체로 빛났다. 제초제를 쓰지 않고, 농업 부산물과 거름을 활용해 농사를 지으니 생태적이다. 매주 박스를 채우려면 다양한 작물들을 길러야 하므로 농사의 다양성과 제철성은 맛의 다양성으로 이어졌다. 소비자 회원은 먹는 것으로 이 작고 아름다운 농사를 지키는 수호자들이 되어주었다. 무엇보다 할머니들 명의로 만들어진 통장에 돈이 쌓이고 ‘내돈내산(내 돈 내고 내가 산다)’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세월을 잡을 수가 없다. 처음부터 ‘할머니 농사’라 칭할 정도로 꾸러미 생산자들은 고령의 여성농민들이었고, 환갑줄이면 막내여서 온갖 실무를 감당해야 한다. 농민 평균 나이가 일흔을 훌쩍 넘었으니 현장에서는 고령화의 체감은 더욱 커 예전만큼 농사 규모를 유지하기도 어렵고 꾸러미 싸는 일도 벅차다. 그리고 소비자들도 변했다. 이 꾸러미를 받아 나물을 다듬고 무쳐 가족들과 먹을 수 있는 소비자층이 점점 더 줄어든다. 이를 ‘1인 가구의 증가에 따른 매식 증가’ 정도로 쓸 수 있을 것이다. 아욱이나 부추 말고 루꼴라나 바질을 길러 보내주면 안 되겠느냐는 요청을 받지만 먹어보지 않은 것을 어찌 기르랴.

위기라 할지 수순이라 할지 모르겠으나 여성농민들의 제철꾸러미 사업은 어려움을 겪는 중이고, 사업을 포기하는 조직도 늘어난다. 농정의 대안이라며 한참 연구자들도 파다가 이제 시들하다. 농업 정책과 지역 정치는 성과로 드러낼 수 있는 선 굵은 일에만 작동할 뿐, 작은 것이 아름다운 이런 일에는 도통 관심을 두지 않는다. 지역의 무료급식소에는 채소값이 올라 반찬 가짓수를 줄인다는데 지역에서 생산한 제철 농산물을 공급할 수는 없을까. 꾸러미를 일일이 꾸리는 것도 힘에 부치는 판에 농사에만 전념하고 ‘선 굵게’ 트럭으로 실어 지역의 먹거리 취약계층에게 전달할 수 있는 ‘지역 선순환’과 ‘먹거리 돌봄 체계’를 꾸릴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그저 여의도와 용산에서 예산을 끌어와 부자 농촌을 만들겠다는 허언만 오늘도 흩날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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