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철원 땅에 머물러서

이재덕 산업부 기자

귀농·귀촌에도 ‘수저계급론’이 있다. 부모의 농사를 물려받을 수 있다면 ‘금수저’, 농부의 자식은 아니지만 그 지역 출신이라면 ‘은수저’, 도시 출신 귀농인들은 ‘흙수저’로 불린다. 평생을 도시에서 살아온 나는 흙수저이지만, 아내는 다르다. 처가 식구들은 장인 장모를 제외하고 대부분 강원 철원에 있고 여든이 넘은 외조부는 평생을 농군으로 살았다. 말하자면 나는 결혼을 통해 금수저로 ‘신분세탁’을 한 셈이다.

이재덕 산업부 기자

이재덕 산업부 기자

하지만 처외조부의 직계 자손들은 공무원, 간호사, 자영업(세탁소) 등 모두 다른 일을 한다. 지방공무원인 넷째는 아프리카돼지열병 같은 가축 전염병이 돌거나, 지역축제가 시작되거나 혹은 장대비라도 내리면 주말도 반납하고 일을 해야 하고, 간호사인 여섯째는 업무량이 많아 매번 야근에 시달린다. 20년간 한자리에서 세탁소를 운영해 온 둘째, 나의 장모는 새 집주인으로부터 “건물 리모델링을 해야 하니 세탁소를 빼달라”는 통보를 듣고 한동안 전전긍긍하며 살았다. 그렇게 힘든 일을 하면서도 농부 하겠다는 사람이 없다.

하루는 밥상머리에서 ‘역시 철원 오대쌀이 맛있네, 비싼 값을 하네’ 이런 얘기를 늘어놓다가 아내와 장모에게 “기자 그만두고 철원 조부모님 땅에서 쌀농사 해보는 건 어떨까요? 값도 잘 받는 것 같은데” 운을 뗐다가 ‘뭐 먹고 살려고 그러냐’는 핀잔만 들었다.

인플레 잡기에 농부만 희생양

그런데 그 오대쌀 가격이 폭락했다. 20㎏ 한 포대에 8만~9만원 하던 쌀이 5만원대 초반으로 떨어졌다. 다른 쌀도 마찬가지다. 기름은 ℓ당 2000원을 넘어 매번 2만원씩 넣고, 아메리카노 한 잔도 4000원대로 올라 3000원대 커피전문점을 찾아다니고, 식당 밥값은 1만원을 훌쩍 넘겨 가급적 싼 음식을 골라 시키는데 이 고물가 시대에 쌀값만 떨어졌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전쟁과 코로나19로 비료값도 뛰고, 기름값도 뛰고, 운송비도 뛰고, 인건비도 뛰었는데 쌀값만 떨어졌다는 건 소비자인 나 대신, 쌀을 판매하는 농민과 지역농협이 그 비용을 모두 부담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현재 지역농협의 쌀 창고(미곡종합처리장)에는 지난해 수확한 쌀들이 가득 쌓여 있다. 창고에 묵은쌀이 가득 쌓여 있으면 수확기 햅쌀 가격도 폭락할 수밖에 없다. 쌀값 폭락을 막기 위해 정부는 농협 창고에 쌓여 있는 쌀을 사들여 격리하는 방식으로 시장에 풀리는 쌀 물량을 조절한다. 올해 쌀 시장격리는 2, 5, 7월 3차례 이뤄졌지만 시기가 늦었고 양도 적었다는 지적을 받는다. 정부가 싼값으로 쌀을 사들이면서 되레 쌀 가격 폭락을 부추겼다는 비판도 받는다.

철원의 한 농부는 요즘 농민들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오대쌀 수매량이 많은 동송농협에 쌀이 쌓여 있어요. 햅쌀은 다음달부터 나오기 시작할 텐데 큰일이죠. 정부가 인플레이션 잡겠다면서 쌀 가격을 일부러 무너뜨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정부가 인플레이션 부담을 농민에게 전가하고 있다는 불만이다.

최근 정부가 낮은 관세로 수입되는 농축산물(TRQ)의 물량을 늘리는 방식으로 농축산물 가격을 낮추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계획이 발표되자 건조마늘 경매가가 ㎏당 500~600원 뚝 떨어졌다. 시세 불안을 느낀 농민들도 마늘 출하를 서두르면서 출하량이 급증했다. 감자도 다음달 준고랭지 감자가 나오면 가격이 자연스럽게 떨어질 것으로 예상됐지만, 수입 감자가 들어오게 되면 가격 폭락을 면할 수 없다.

‘푸대접 농부’ 누가 하려 할까

추경호 경제부총리도 “제일 급한 게 물가 안정”이라며 “(관세 인하 등으로) 10월 정도 가면 밥상 물가, 장바구니 물가는 안정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쯤 되면 정부의 물가 안정 정책이 누구의 희생으로 이뤄지는지 다들 짐작할 수 있다. 농부의 자제들이 농부가 되지 않으려 하고, 매년 읍·면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는 숫자가 매년 유입되는 귀농·귀촌 인구와 비슷한 것도, 농사지으면 평생 흙수저 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농촌 주민들은 다들 알기 때문 아닐까.

처가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처삼촌이 이런 말을 했다. “6·25 때 할아버지가 조금만 더 남쪽으로 내려가셨으면 좋았을 텐데… 경기도로 가셨어야지, 왜 하필 철원 땅에 머물러서….” 조상님도 모르셨을 거다. 그 귀한 농부가 이런 푸대접을 받게 될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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