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농부는 왜 서울역에 갔을까

이재덕 산업부 기자
[이재덕의 귀농연습] 사과 농부는 왜 서울역에 갔을까

명절이 다가올 때마다 항상 전북 장수의 사과 농부에게 전화해 선물용 사과 두세 상자를 주문한다. 그의 사과 과수원은 제초제를 뿌리지 않고, 농약 등 해충 방제약을 적게 쓴다. 그가 키우는 홍로 사과는 달콤하고 아삭거리는 식감이 좋다. 선물받은 지인이 사과가 참 맛있다며 과수원 전화번호를 알려달라 했을 때 뿌듯했고 그에게 감사했다. 그런데 이번 추석에는 전화를 할까 말까 고민스러웠다. 아내가 “올해는 이른 추석이라 사과값이 비싸니 이번 추석에는 다른 걸 선물하자, 사과는 추석 이후에 값이 좀 내리면 구입하자”고 해서 마지못해 “그러겠다”고 답했는데 내내 마음에 걸렸다. 전화를 걸어 “이번에는 추석 끝나고 홍로를 몇 상자 구입하겠다”고 말하려는데 그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이재덕 산업부 기자

이재덕 산업부 기자

“올해 사과는 망쳐버렸어. 15년 농사 중 이런 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 사과 탄저병이 돌았어.” 탄저병은 사과 표면에 곰팡이가 퍼지면서 흑갈색 반점이 생기고 과육이 썩는 병이다. 고온다습한 상황이 이어지면 사과나무 윗부분부터 곰팡이가 퍼져가기 시작한다. 올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탄저병을 막기 위해 8월에 장수의 많은 사과 농가들이 탄저병 방제약을 뿌렸지만 비가 자주 내리는 바람에 약이 씻겨 내려갔단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작황이 좋았다고 한다. 그때는 홍로를 빨갛게 익히기 위한 작업으로 정신이 없었다. 추석 대목을 앞두고 사과를 새빨갛게 만들기 위해 온갖 기술들이 동원된다. 농부들은 사과에 빛이 직접 닿을 수 있도록 사과 주변 잎들을 모두 따주고, 골고루 햇빛을 보도록 열매를 돌려주기도 한다. 그 작업이 너무 힘들어 매번 이주 노동자를 불러 일을 시키지만 최근 몇년 동안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국내에 들어오는 이주 노동자가 줄면서 인력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가 됐다. 지난해 가을 그의 과수원을 찾아갔을 때 일하는 모습을 직접 본 터라 그가 얼마나 고생을 하며 홍로를 키우는지 잘 알고 있다. 사상 최장 장마에 수해가 이어졌던 전전해에는 폭우로 산사태가 발생하면서 뒷산의 흙과 바위가 그의 과수원을 덮치기도 했다. 지금도 그는 폭우가 내리는 날이면 “물길을 잡아야 한다”며 뒷산으로 올라간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홍로가 시커멓게 썩어버렸으니 그의 마음이 얼마나 타들어갈까. 감히 짐작조차 하기 어려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가 말했다. “어제(8월29일)는 서울에 갔었어.” “서울은 무슨 일로?” “쌀값 폭락 막아야 한다고 농부들이 서울역에서 시위를 했거든….” “그 속에 어떻게 서울 올 생각까지 했어? 사과 농부가 이 바쁜 시기에 웬 쌀값 시위야. 그나마 남은 사과 하루빨리 수확해야지.” “아니야, 쌀이 무너지면 사과도 무너져.”

사과 농부가 상경한 그날, 서울역 앞에서는 농민 1만명이 쌀 나락을 길에 뿌리며 ‘정부가 하루빨리 상당량의 쌀을 시장에서 격리시켜 폭락하는 쌀값을 안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산지 쌀값은 20㎏당 4만2522원으로 전년 대비 24%나 하락했다. 9월부터 본격적으로 햅쌀이 수확되면 쌀값이 추가로 폭락할 가능성이 높다. 집회를 주최한 농민단체들은 “우리 농민들도 국민이다. 국가가 당연히 책임져야 할 국민의 한 사람이다. 생산비 폭등과 쌀값 폭락이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는 농민들을 위해 이제는 정부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밥 한 공기 쌀값 300원 보장”이라고 적힌 팻말도 들었다.

쌀값 폭락 탓에 전북 김제에서 농부들이 트랙터로 논 일부를 갈아 엎었다는 신문 기사를 읽었다. 기사 속 사진에는 “쌀 그만두고 커피콩 심을란다”라고 적힌 현수막이 보였다. 식량인 밥 한 공기 쌀값은 300원도 안 되는데, 커피는 한잔에 4000원을 훌쩍 넘으니 부아도 나고 서운한 마음도 들어 적은 현수막일 터다. 하지만 농부들은 다 안다. 농정이 쌀을 지켜내지 않으면, 쌀이 무너지고 곧 사과도 무너지고, 언젠가는 수익성이 좋은 커피도 무너질 것이란 사실을. 농업을 홀대하는 나라에서는 어떤 농사도 유지될 수 없다. ‘사과는 다음에 주문할게’라는 말을 차마 건넬 수 없어 결국 그의 귀한 홍로 한 상자를 구입해 처가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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