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대와 환대 사이

오수경 자유기고가

버스나 지하철, 카페나 식당 등에서 아이를 만나면 자꾸 웃기고 싶어진다.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어 인사하거나 ‘까꿍놀이’를 하며 눈을 맞추면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아이가 방긋 웃는다. 그럴 때면 세상 뿌듯하다. 지금은 마스크 때문에 웃는 얼굴을 보여주지 못해 아쉽지만, 실없이 보일지라도 아이를 웃게 하려고 정성을 쏟는 이유는 사회에 나온 그 아이에게 ‘환대’라는 경험을 선물로 주고 싶기 때문이다. 안녕, 반가워, 아이야, 너를 환영해.

오수경 자유기고가

오수경 자유기고가

반대로 일부러 눈길조차 주지 않을 때도 있다. 아이가 울거나 떠들 때이다. 결코 싫어서가 아니다. 나의 눈길이 아이나 양육자에게 불편하다는 신호가 되지는 않을까 싶어서다. 그렇기에 나의 도움이 필요할 때를 대비해 예의주시하면서도 겉으로는 일단 무심한 척한다. 공공장소에서 아이가 떼를 쓰며 울거나 조금 시끄럽게 하는 게 뭐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니, 그러려니 하는 마음에서 더욱 그렇게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이가 내는 소리보다 무례하고 부주의한 어른들이 내는 소음이 더 거슬릴 때가 많다.

환대와 무심이라는 양면의 감각은 내 주변 양육자들의 경험을 통해 배웠다. 아이를 동반하여 외출할 때 그들은 유난히 위축되었고 긴장했으며 필요 이상으로 저자세였다. 어쩌다 아이가 “낑~” 소리라도 내면 쏠리는 시선에 어쩔 줄 모르며 “조용히 해~ 이러다 여기도 노키즈존 될라”라는 말을 자조적으로 하거나, 행여 “개념 없는 엄마” 소리 들을까봐 머무는 동안 지저분해진 주변을 원래 상태보다 더 깔끔하게 청소하고 서둘러 나와야 비로소 안심했다.

어쩌다 아이와 비행기를 타게 된 양육자들은 작은 간식 꾸러미를 준비하곤 했다. 아이 소리 때문에 불편해할 주변 승객들에게 양해를 구하기 위해 돌리는 게 일종의 ‘에티켓’이라 했다. 그런 ‘에티켓’이 당연한가? 그런 불필요하고 부당한 수고는 왜 필요하게 되었을까? 양육자가 아닌 나조차 그들과 반나절만 같이 있어도 경험할 수밖에 없는 냉대의 시선 때문일 것이다. 그런 시선 때문에 나까지 덩달아 조마조마해지고 위축된 적이 많다. 그런 경험이 쌓이다보면 우리 사회는 유난히 아이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에게 엄격한 기준을 들이대며 조심성을 강요한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제주도행 비행기에서 아이 소리가 시끄럽다며 양육자에게 폭언하고 난동 피운 남성에 이어 KTX 열차에서도 남성이 아이가 떠든다는 이유로 난동 피운 사건이 발생했다. 이런 사건이 있을 때마다 아이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에게 에티켓을 강요할 게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기 위한 시민의 에티켓을 학습해야 하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이럴 때 ‘개념 없이 행동하는’ 일부 사례를 굳이 들먹이며 그 터부와 폭력을 옹호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런 이해와 너그러움이 왜 아이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것인가? 그렇게 터부와 폭력을 옹호하다 보면 결국 ‘노○○존’ 목록을 늘리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 사회가 그렇게 흘러가도 괜찮은가? “나에게 왜 피해를 주냐”며 나보다 약한 상대를 냉대하고 힘으로 제압하려는 건 ‘권리’로 정당화될 수 없다. 어떤 대상을 귀찮고 시끄럽다 여겨 배제하며 내모는 사회는 사회일 수 없다. 아이들 소리와 ‘내 권리’를 경쟁하는 어른도 어른은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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