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석의 ‘허망한 승리’

[강준만의 화이부동] 이준석의 ‘허망한 승리’

지난해 5~6월 ‘이준석 돌풍’이 불었을 때 당시 여당이던 더불어민주당은 크게 당황했다. 곰팡내 나던 국민의힘에 새 바람이라도 불었다간 큰일 난다는 위기의식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5월31일 이준석이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 예비경선을 1위로 통과하자 민주당의 상근부대변인은 이준석을 향해 “히틀러의 향기가 난다”는 극언을 구사했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6·11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이준석이 예상을 깨고 새로운 당대표로 선출되자, 진보언론과 지식인들까지 이준석을 겨냥한 집중공격을 퍼부었다. 그 주요 내용은 이준석이 사회적 약자에 대해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는 식이었다. 나는 너무 지나치다 싶어 그런 비판에 대한 반론을 쓰기도 했다.

당시엔 내 주변에서도 이준석에 대한 욕설을 꽤 들을 수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서 사는 서울만 해도 음식점이나 카페 같은 곳에서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남이 들을 수 있게끔 크게 말하진 않는다. 하지만 내가 사는 전주는 전체 인구의 80% 이상이 민주당 지지자들인지라 그런 에티켓이 잘 지켜지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내 주변에서 이준석을 칭찬하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유는 단 하나. 이준석을 대통령 윤석열과 맞짱을 뜨는 투사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내부 총질이나 하던 당 대표”라는 윤석열의 발언이 공개된 7월26일이 그 분기점이었다. 이는 여론조사에서도 잘 확인되고 있는 사실이다.

7월1~2일에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기사들이 보도되었다. <이준석 당 윤리위 징계 ‘찬성 53.8% vs 반대 17.7%’> 민주당 지지자들까지 포함된 전체 여론 결과였다. 그러나 국민의힘 지지자들만의 생각을 다룬다면 기사 제목은 다음과 같이 나왔어야 했다. <이준석 당 윤리위 징계 ‘반대·신중 58% vs 찬성 38.1%’>

국민의힘 윤리위가 이준석에게 ‘당원권 정지 6개월’ 중징계를 내린 7월8일에서 9일까지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국민의힘 지지층은 징계수위가 ‘과도하다’ 39.9%, ‘적절하다’ 39.2%, ‘미흡하다’ 14.2% 등의 반응을 보였다. 반면 민주당 지지층에서는 ‘미흡한 징계’라는 응답이 36.4%로 가장 높았다.

누구의 승리가 아닌 정치의 완패

이 두 여론조사 결과가 말해주는 건 민주당 지지층이 국민의힘 지지층에 비해 이준석에 대해 훨씬 더 비판적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준석의 윤석열 비판이 본격화되는 8월 들어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난다. 이준석에 대해 민주당 지지층은 ‘호감’, 국민의힘 지지층은 ‘비호감’으로 급전환한다. 여론조사업체들과 언론은 국민의힘 내부의 문제를 전체 유권자들에게 물어 이른바 ‘역선택’ 현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이준석의 정치적 입지에 대한 착시 현상을 유발했다. 다음과 같은 기사 제목들을 보자.

<유승민·이준석 신당 창당 시 국민 42.5% “국힘 말고 신당 지지”> <국민의힘 위기 책임, ‘윤핵관’ 35.5%, 尹 대통령 28.6%, 이준석 22.5%> <“비대위 전환 잘못” 52%> <與 쇄신 대상은? 윤핵관 47.4% 이준석 24.0%… 23.7%는 ‘둘 다’>

이는 몇몇 언론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대부분의 언론이 다 그런 식으로 보도했다. 기사 제목만 대충 살펴보는 독자들에겐 이준석이 여론전에서 이기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 제목들은 공정하지도 않고 올바르지도 않다. 보수신당 창당에 대한 생각을 왜 민주당 지지자들에게까지 묻는가? 아니 물을 수는 있다. 문제는 그들이 보수신당과 국민의힘 중 어떤 선호도를 보인다고 해서 그걸 곧장 “국힘 말고 신당 지지”라는 식으로 말해도 괜찮으냐는 것이다. 이들이 민주당을 버리고 신당으로 간다는 말인가? 아니면 궁극적으로 이준석이 당을 옮겨 민주당 사람이 될 수도 있단 말인가? 그게 아니잖은가.

위 네 건의 여론조사는 국민의힘 지지층의 생각 중심으로 보도했어야 옳았다. 민주당 지지층의 생각을 기사 본문에서 밝힐 순 있겠지만 적어도 제목은 국민의힘 지지층의 생각을 보여주는 것이어야 했다. 그렇게 할 경우 기사 제목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유승민·이준석 신당창당 시 ‘국힘’ 75.4%, ‘신당’ 19.8% 지지> <국민의힘 위기 책임, 이준석 46.5%, ‘윤핵관’ 27.3%, 尹 대통령 10.6%> <“비대위 전환 잘한 것” 55.5% “비대위 전환 잘못” 34.9%> <與 쇄신 대상은? 이준석 48.9%, 윤핵관 26.7% … 16.87%는 ‘둘 다’>

민주당 지지자를 포함한 전체 여론을 소개한 앞의 기사 제목들과 비교해 어떤 느낌이 드는가? 전혀 다른 그림이 아닌가? 오죽 답답했으면 국민의힘 소속 충북지사 김영환은 이준석을 겨냥해 “민주당의 역선택에 의존하는 정치를 언제까지 할 것인가”라며 “그들이 타고 있는 배가 윤석열 몰락 기원의 깃발을 펄럭이며 배신의 항구에 닿고 있다”고 탄식했겠는가.

사실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지지자들의 전략적 응답은 놀라울 정도로 일사불란했다. 이준석 성비위 수사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8월 하순 현재 7월 초순과 비교해 거의 180도 달라졌다. 8월23~24일에 실시된 뉴스토마토-미디어토마토 여론조사에서 여당 지지층 10명 중 7명은 ‘정당한 수사’로 본 반면 야당 지지층 10명 중 6명꼴로 ‘정치적 목적’의 수사를 의심한다는 반응을 보였으니,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만약 여론조사업체들과 언론이 그런 방식으로 민주당의 내분을 다뤘더라면, 즉 국민의힘 지지자들의 역선택이 큰 영향을 미친 여론조사를 하고 보도했다면 아주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국민의힘 내분에 대해선 그랬던 걸까? 무슨 정치적 음모를 갖고 그런 것 같진 않다. 싸움의 흥행에 집착한 상업주의적 고려가 작용한 게 아닌가 싶다. 민주당 내분보다는 국민의힘 내분이 훨씬 더 드라마틱한 재미가 있다고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뒤늦게 배워야 할 건 굴복

수없이 양산된 이런 이상한 여론조사 기사들이 법원의 판단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지난 8월26일 서울남부지법은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직무 집행 정지’ 가처분 결정을 내렸다. 일부 언론은 ‘이준석의 승리’를 선포했지만 너무 성급했다. 전 민주당 의원 금태섭이 “이번 결정은 국힘의 완패인 것이 틀림없지만, 누구의 승리라고도 말할 수 없는 정치의 완패”라고 한 게 정확한 평가가 아닌가 싶다.

금태섭은 윤석열 정권의 “핵심 구성원의 질과 실적이 참담한 수준”이라고 했는데, 사실 윤석열과 윤핵관의 무능은 경이로울 정도이다. 이준석은 그걸 폭로한 1등 공신이다. 다만 그렇게 해서 이준석이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굳이 승리라고 부르겠다면 ‘허망한 승리’라고 하는 게 옳다. 그가 얻은 야권 지지자들의 지지와 사랑은 ‘하루살이’인 반면, 여권 지지자들에게 각인된 그의 이미지는 자신이 우뚝 서지 못한다면 지구가 멸망해도 좋다는 식의 엽기적인 자기애를 가진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이준석의 승리’가 장기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가능성은 단 하나다. 사실상 윤석열이 굴복하는, 윤석열과 이준석의 화해다. 실제로 “이준석을 품으라”는 주문이 꽤 나왔다. 나는 윤석열이 그렇게 할지 안 할지 잘 모르겠다. 내가 더 궁금하게 생각하는 건 품는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얼 의미하느냐는 것이다. 윤석열은 이미 이준석을 두 번 품은 바 있다. 대선을 불과 3개월여 앞둔 시점에서 이준석이 벌인 제1·2차 잠적 사태를 상기해 보라.

이준석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그간 이준석이 가장 큰 공을 들인 윤핵관 비판의 모든 담론을 살펴보라. 모든 게 주도권 투쟁과 관련된 것이었을 뿐 공적 콘텐츠가 거의 없다. 이준석의 주도권 행사가 국민의힘에 바람직한 혁신의 바람을 불러올 수 있는 면도 있겠지만,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을 게다. 이준석의 사전엔 대화와 타협이 없기 때문이다.

이준석은 모든 걸 싸우는 방식으로만 해결하려고 든다. 그가 희대의 싸움꾼임은 잘 입증해 보였지만, 그가 원하는 건 통합을 지향하는 지도자의 길이 아닌가? 공인으로서 자신에게도 큰 책임이 있는 그간의 모든 논란에 대해 사죄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앞으로 어떻게 달라지겠다는 걸 밝히고 설득해야 한다. 그가 뒤늦게 배워야 할 건 굴복이다. 그가 ‘허망한 승리’를 넘어서려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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