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과 서울시장은 상상력을 발휘하시라

이명희 사회에디터

지난해 허리케인 아이다가 뉴욕에 비를 쏟아붓던 날, 미국 폭스 뉴스의 기상 전문 PD 그레그 다이아몬드가 트위터에 글을 올렸다. “센트럴파크 서쪽엔 폭우가 내렸지만, 홍수 피해는 없어.”

이명희 사회에디터

이명희 사회에디터

이 트윗에 미국 누리꾼들의 집중 포화가 쏟아졌다. “고급스러운 동네에서 정보 알려줘서 고마워” “모든 도시가 다 똑같은 건 아니다”…. 날선 댓글들과 함께 영화 <기생충>을 캡처한 사진도 올라왔다. “오늘 하늘 완전 파랗고 미세먼지 제로잖아. 어제 비 왕창 온 덕분에.” 차 뒷자리에 앉은 연교(조여정)의 통화 내용을 듣던 기택(송강호)의 표정이 싸해지는 바로 그 장면이다. 그 비가 왕창 온 덕분에 기택의 반지하 집은 침수됐고, 그의 가족은 임시대피소에서 고단한 밤을 보내야 했다. 현실이 아닌 ‘이야기’는 현실과 포개진다.

비가 또 왕창 왔다. 바람까지 세게 불었다. 이번에는 대통령도 퇴근하지 않았다. 태풍 ‘힌남노’가 한반도를 강타하면서 전국에서 인명과 침수 피해가 속출했다. 경북 포항의 피해가 가장 컸다. 포항의 한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는 세워둔 차를 옮기려다 주민 7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는 참사가 발생했다. 최근 주차 공간 부족 등으로 지하에 주차장을 만드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폭우로 물이 차오르면 지하주차장은 속수무책이다. 지하 공간 특성상 방수와 배수시설 확보가 필수적이지만 관련 법·제도는 사실상 전무하다고 한다.

약자 존중 빠진 ‘반지하 일몰제’

올해 우리는 기후위기가 현실로 다가왔음을 온몸으로 절감하고 있다. 연초부터 이례적인 겨울 가뭄으로 대형 산불이 잇따라 발생했고, 폭염과 폭우 등 예측하기 힘든 날씨가 교차하고 있다. 한 달 전 수도권에 내린 폭우의 상흔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추석을 앞두고 초강력 태풍까지 불어와 큰 피해를 입었다.

기후위기에 대한 심각성은 다른 문제들에 가려져 그동안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았다. 기후위기로 인한 재난이 어떤 식으로든 눈에 보일 때는 혹독한 대가를 치른 후다. 지난달 8일 서울에 쏟아진 폭우는 1907년 기상관측 이래 최대치로, 겪어보지 못한 폭우였다. 도시 곳곳에서 침수 피해가 발생했고, 빗물에 취약한 지역도 드러났다. 서울에서만 5명이 사망했다. 이 중 4명은 반지하층에 거주하던 주거 약자였다.

늘 그렇듯 재난은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한 부분을 먼저 덮친다. 지하주차장 침수로 인한 인명 피해도 처음이 아니다. 집중호우 때마다 침수 방지시설 관련 지침 부재가 지하주차장의 인명 피해를 키우는 주요 원인으로 지적된다. 침수 피해를 예방하려 법과 행정 체계를 바꿨지만 반지하 거주자들의 참사를 막지 못했다. 묘안이 없을까.

최근 서울시가 주거약자를 위해 내놓은 ‘반지하 일몰제’는 얼핏 그럴듯해 보이지만 ‘약자’에 대한 존중이 빠져 있다. 게다가 서울시의 대책은 지난달 8일 밤 폭우로 반지하에 살던 일가족 3명이 참변을 당한 지 이틀 만에 나온 것이다. 무작정 반지하를 없애면 대체 어디로 가야 할까. 반지하 주택이라고 다 위험한 것도 아니다. 고시원, 쪽방 등 반지하보다 열악한 주거 형태도 많기 때문이다. 반지하에 거주하는 20만가구를 전제로 폭우 피해를 막기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미국 뉴욕주가 같은 사안을 두고 정반대 대책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 지난해 9월 허리케인 아이다가 몰고 온 큰 비로 뉴욕에서 많은 사상자가 나왔는데, 사망한 13명 중 11명이 지하층에 사는 저소득층이었다. 뉴욕주는 반지하 주택을 금지하고 있는데, 침수사고가 나자 이의 합법화를 추진했다. 현실을 인정하면서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방법을 택한 것이다.

공감정책 없인 ‘따뜻한 나라’ 없어

정부와 지자체는 기후위기 시대 자연재해에 의한 재난이 일상적으로 다가온다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이에 대처하는 종합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런 일을 하라고 정부가 있는 것이다. 다만 대책을 급조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시작은 고통을 공감하는 것부터다. 지금 이 난리가 났는데 정책을 만드는 이들이 울고 있는 약자들에 대해 어떤 상상력도 가지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한데 상황은 반대로 흘러간다. 침수사고가 반복되는 반지하 주택에 대한 논의가 뜨거웠던 게 얼마 전인데, 윤석열 정부는 내년도 예산에서 주거약자들의 주거 상향에 효과적인 공공임대 관련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제시한 게 ‘따뜻한 나라’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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