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축재정과 879억 영빈관

이호준 경제부 차장

이달 초 국회에 제출된 내년도 예산안은 지출 증가율이 2017년 박근혜 정부 이후 가장 낮았다. 처음에 계획했던 본예산이 아니라 추가경정예산(추경)까지 포함한 비교라는 게 약간 궁색하지만, 어쨌든 2010년 이후 처음으로 전년 대비 예산 규모도 줄었다. 문제는 새 정부 출범 후 돈 쓸 곳은 산더미같이 쌓였는데, 긴축재정으로 허리띠를 졸라매다 보니 정부가 재량껏 쓸 수 있는 돈이 9조원 남짓으로 턱없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이호준 경제부 차장

이호준 경제부 차장

그래서 실시한 지출 구조조정이 무려 24조원이었다. 대부분 기존 사업 예산을 없애거나 깎아서 대부분 마련됐다. 역대 정부가 매해 통상 10조원 안팎의 기존 예산 구조조정을 해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말 그대로 역대급 예산 칼질이 이뤄진 셈이다. 이 과정에서 지역화폐 예산은 전액 삭감됐고, 공공형 노인일자리 예산도 줄어 내년에는 6만개가 넘는 공공형 노인일자리가 사라진다. 전 정부 예산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학교 재생 사업이나 수소차·신재생에너지 사업 예산은 큰 폭으로 줄었다. 고통분담 차원에서 공무원 임금은 1.7% 인상되는 데 그쳤고, 4급 이상은 동결했으며, 장차관은 10% 월급을 반납한다는 결의도 내비쳤다.

빚에 대한 새 정부의 경계와 공포가 얼마나 큰지는 최근 정부가 쏟아낸 정책들에서도 두드러진다. 재원 마련을 위해 16조원이 넘는 국유재산을 5년간 매각하고, 일정 규모 이상 정부 지출을 늘리지 못하도록 하는 재정준칙 법제화도 내놨다. 빚 많은 공공기관에 대한 재무 구조조정 사업도 추진된다.

이 같은 노력들 덕분일까. 국내총생산(GDP)의 50%가 넘는, 1100조원에 육박하는 국가부채를 이대로 안고 갈 수 없다는 정부의 메시지는 나름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듯했다.

이런 일련의 정책과 메시지에 약 900억원짜리 영빈관이 갑자기 찬물을 끼얹었다. 메시지의 정점에서 가장 솔선수범해야 할 대통령실이 내년부터 879억원의 예산을 들여 영빈관을 건립하겠다고 국회에 보고하면서다.

당초 대통령실은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나 용산 대통령실로 이전함에 따라 외빈 등을 맞을 적절한 영빈관의 신축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댔다. 야당과 언론에서 황당하다는 반응이 쏟아졌지만, 대통령실은 ‘국회가 판단할 일’이라며 일단 버텼다. 그리고 여론이 더 나빠지자 슬그머니 대통령의 결단으로 포장해 신축 구상을 철회했다. 야당도 해당 예산 전액 삭감을 별렀던 터니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로 실속 없는 잡음만 만들었던 셈이다.

900억원짜리 영빈관 신축이 취소된 것은 두 손 들고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최근 정부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복합경제위기의 이 엄중한 시국에’ 어떻게 이런 계획이 예산에 포함될 수 있었는지는 살펴봐야 한다. 나라살림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겠다며 역대 최대 지출 구조조정까지 실시한 마당에, 최소한의 눈치나 예의도 없는 예산이 어떻게 국회에 제출될 수 있었는지 야당이 따져묻기 전에 대통령실이 먼저 나서서 해명할 필요가 있다. 논란 끝에 없던 일로 하기에는 이번 영빈관 사건은 정부 신뢰라는 가장 중요한 자산에 너무 큰 상처를 입혔다. 앞으로 정부에서 허리띠의 ‘허’자만 꺼내도 사람들은 이 900억원짜리 영빈관부터 떠올릴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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