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소수자는 탈출을 꿈꾼다

변재원 작가·소수자정책연구자

제주도에 살아온 20년간 이름이 다섯 번 바뀌었다. 장애인인 내 몸이 아플 때 한 번, 어른들께 손가락질당할 때 한 번, 길거리에서 모욕을 겪을 때 한 번,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할 때 한 번, 학교에 갈 수 없어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때 한 번. 제주도에서 장애인 자녀를 키우며 고립감을 느꼈던 나의 친모는 삶이 한계에 봉착할 때마다 미성년 자녀의 이름을 동의도 구하지 않고 바꾸었다. 수차례의 개명은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로 남아 있다.

변재원 작가·소수자정책연구자

변재원 작가·소수자정책연구자

장애인과 가족이 수도권 아닌 지방에서 사는 것은 버텨내기의 연속이었다. 장애인 부모는 ‘어쩌다 장애인을 키우게 됐냐’는 걱정인지 비난인지 구분하기 힘든 이웃의 말과 시선을 견뎌야 하고, ‘장애인을 키우는 데 너무 힘 빼지 말고 하나 더 낳아라’는 무책임한 응원을 감내해야만 했다. 한밤중 장애인 자녀가 열이 펄펄 끓어도 장애 문제를 진단할 병원이 없어 발만 동동 굴리거나, 정보를 공유하는 자조모임이나 상담센터도 찾아볼 수 없어 모든 책임을 독박으로 감당해야 했다. 지지하는 환경도, 응원해주는 사람도 찾아보기 힘든 열악한 곳에서의 생존은 전적으로 부모의 몫이었다.

장애인 자녀 양육의 책임을 모두 떠맡은 부모 사이에 공과의 위계도 있었다. 장애인 자녀를 양육하는 과정에서 공로는 아빠에게, 비난은 엄마에게로 향했다. 친모는 지방의 시선을 좀처럼 감당하기 힘든 날이면 장애인 자녀를 집에 두고 짐가방을 든 채 공항을 향해 홀연히 사라졌다.

차별과 멸시의 시선, 열악한 인식, 배제가 익숙한 환경 속 지방 여성과 장애인들은 살아남기 위한 탈출을 꿈꾼다. 사람이 빠져나갈수록, 다시금 돈이 돌면 사람은 몰려들 것이라는 인과론적 믿음에 지배된 정치인들은 지역 강소 기업 육성 정책, 특성화 산업 정책, 메가시티 추진 정책 등을 제시하지만 차별 해소를 위한 정책은 찾기 어렵다. 문화가 뒷받침되지 않는 사회, 장애인과 여성이 고립감을 터놓을 수 없고, 심리적 안정감과 소속감을 기대할 수 없는 채로 일상화된 비난을 마주하는 소수자들은 지방의 푸근한 환대의 기억은커녕 냉정한 탈출을 계속 강요당할 것이다.

서대문구 한 주민센터에서 전입신고하던 날, 개명된 이름이 새겨진 주민등록증을 만지작거리며 순번을 기다리다 생각했다. 제주도의 친모는 어쩌다 내 이름을 이렇게 많이 개명해야만 했을까. 누군가는 그 기이한 행적을 두고 ‘미친 짓’이라 평하고 말았지만, 온전히 그녀의 잘못이었을까. 지방에서 겪은 의료사고로 자녀가 장애인이 되었을 때의 절망, 애를 장애인으로 만들었다며 돌고 도는 지역민의 핀잔과 비난들. 꼭 그녀 혼자 감당해야만 했을까. 심리상담조차 제대로 받질 못했고, 동료 장애인 가족들을 제대로 만나 위로를 나눈 적도 없이, 홀로 장애인 자녀를 업은 채 서울을 오가며 치료받아야만 했던 기약 없는 20년의 분투는 얼마나 큰 두려움이 늘 함께했을까.

수차례 개명 시도는 그에게 어떤 실낱같은 희망을 품게 했을까. 만일 나와 내 자녀가 지방을 탈출할 수 없다면, 가혹한 운명에서라도 벗어나자는 발버둥은 아니었을까. 장애인 자녀를 둔 지방의 ‘악녀’가 품을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은 현실에 없고 운명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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