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디스토피아

조희원 참여연대 활동가

디스토피아 하면 떠오르는 장면은 빽빽이 들어찬 높은 건물 사이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도시의 모습이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가 내게 그런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블레이드 러너>는 이미 망가져 버린 지구의 전경을 비춘다. 망가진 기후로 인해 해가 들지 않는 도시에는 언제나 산성비가 내린다. 빗물과 도시 오물이 뒤섞여 흐르는 질척한 땅바닥. 도시 하층민은 그런 질척한 땅 위에서 건강에 좋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산성비를 맞으며 살아간다.

조희원 참여연대 활동가

조희원 참여연대 활동가

이 글을 써내려가는 지금, 창밖에도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맑다가도 갑자기 내리는 비 때문에 신발과 바지가 젖은 채 들어온 게 여러 번, 통상의 날씨를 피해 비를 뿌리는 범인은 ‘기후위기’다. 1980년대의 상상력이 그린 망가진 기후 속 하층민이 질척한 땅바닥 위의 부랑자라면, 2022년에 마주하는 도시 빈가는 가장 높거나 낮은 곳에 있다. 차가 닿을 수도 없이 가파른 오르막 위나 햇빛도 잘 닿지 않는 반지하. 속수무책으로 바뀌는 기후에 더 연약할 수밖에 없는 곳들이다. 재난은 더 취약한 곳에 더 큰 상처를 남기기에, 재난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불평등에 대비해야 한다.

평균 기대수명 100세를 바라보는 고령화 시대. 아직 나는 60년도 더 살아야 하는데, 여름은 견딜 수 없이 더워지기만 하고 해수면은 높아진다. 인간이 손쓸 수 없이 일어나는 재해는 인류를 넘어 동물의 생명, 생태계까지 위협한다. 식탁도 위험하다. 언제까지 배부르게 지금의 음식을 먹을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다. 플라스틱 쓰레기는 산처럼 쌓여 이미 바다 한구석에 섬을 이룬 지 오래다. 속수무책으로 쓸려 내려가는 가난한 삶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까지의 생활방식을 유지한다면 이 지구에 나와 내 친구의 삶은 더는 없을지 모른다. 이처럼 기후는 더 이상 환경에 그치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기후정의’다.

얼마 전 진행된 9·24기후정의행진에 등장한 문구는 여러 가지였다. 일하다 죽지 않고, 내 삶과 일터를 잃을 불안에 떨지 않고, 소수자인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사회. 이 3만5000 시민의 요구는 제도에 닿고 있을까. 잘 모르겠다. 오히려 기업이 ‘그린워싱’한 녹색경영과 정부의 민간화 추진 사업에서 기후위기라는 단어를 발견할 수 있다. 여전히 탈탄소 정책은 요원하며, 국민연금 기금은 탄소기업에 투자해 운용된다. 불평등 해결을 위한 복지 예산은 감축됐고, 의료서비스도 민간으로 돌아가고 있다.

결국 싸워야 할 것은 이 현실을 부정하는 정치다. <블레이드 러너>의 비가 그치지 않는 도시는 누군가에게는 그저 ‘스타일리시’한 영화적 배경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문 밖의 현실이다. 영화의 기후위기 대안은 지구 외 이민이었다. 하지만 현실의 우리가 벗어날 곳은 없다. 살아남기 위해선 현실의 잘못된 생활 방식을 바꾸기 위해 부지런히 싸워야 한다.

행진 당일 다이인(die-in) 퍼포먼스를 하기 위해 미국대사관 앞 차로에 누웠다. 광화문 한복판, 그 넓은 차로에 누워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10초가 넘는 시간 동안 바라보았다. 이 아름다운 하늘을 잃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이제 과감한 정책으로 실현할 때이다.


Today`s HOT
올림픽 성화 도착에 환호하는 군중들 러시아 전승절 열병식 이스라엘공관 앞 친팔시위 축하하는 북마케도니아 우파 야당 지지자들
파리 올림픽 보라색 트랙 첫 선! 영양실조에 걸리는 아이티 아이들
폭격 맞은 라파 골란고원에서 훈련하는 이스라엘 예비군들
바다사자가 점령한 샌프란만 브라질 홍수, 대피하는 주민들 토네이도로 파손된 페덱스 시설 디엔비엔푸 전투 70주년 기념식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