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로 예술을 오염시키는 방법

김현호 사진비평가·보스토크 프레스 대표

기관의 자문이나 심사에 참여하는 일이 늘었다. 중년에 다다른 나이와 잡다한 직함들 때문일 것이다. 10여년간 사진에 대한 글을 쓰거나 책을 만드는 일을 해온 터라, 작가나 프로젝트에 대한 지원을 판단하는 자리에 가기도 한다. 물론 마냥 즐겁지는 않다. 지원서를 읽다 보면, 작가들이 해온 작업과 그들의 문제의식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그래서인지 회의에서 만나는 심사위원들은 대체로 조심스럽다. 간혹 작업을 함부로 단정짓는 이들도 있지만, 그 말을 야멸차게 끊는 이도 나뿐만은 아니다.

김현호 사진비평가·보스토크 프레스 대표

김현호 사진비평가·보스토크 프레스 대표

심사와 지원 제도에는 근본적 약점이 있다. 작가와 작업을 이해하려면 그의 문제의식이 동시대와 어떻게 관계하는지를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몇 장의 지원서와 잠깐의 대화, 몇 줄의 심사평으로 작가를 평가할 수는 없다. 나는 언제나 터무니없이 젊은 나이에 휘적휘적 걸어와서 당대의 예술을 번쩍 들어다 다른 곳에 가져다 두는 작가를 기다린다. 그때 오늘 우리가 점잖은 척 나눈 대화는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심사 요청이 오면 최대한 빠지지 않으려 노력한다. 고마움 때문이다. 나는 한 미술전문지의 격년제 공모에서 평론상을 받으며 비평을 쓰기 시작했다. 상금도 큰 힘이 되었지만 일과 생활에 떠밀릴 때마다 한 번쯤 글로 인정받은 경험은 나를 적잖이 지탱해 주었다. 사실 작가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 세상이 나를 위한 준비조차 안 된 거’라고 마냥 생각할 수 있는 이는 드물다. 지원과 수상의 경험은 그들이 작업을 이어가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요즈음의 사태는 실로 가볍지 않다.

나는 앞으로 벌어질 심사의 풍경을 상상할 수 있다. 둘러앉은 위원들은 소개를 하고 명함을 교환한다. 나이가 지긋한 교수가 심사위원장으로 호선된다. 그는 담당자에게 차분하게 묻는다. 심사할 때 저희가 고려할 점이 있을까요. 담당자는 진중하고 예의바르게 대답한다. 전혀 없습니다. 서류를 보시고 위원님들께서 판단해 주시면 됩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조심스럽게 한마디를 덧댈지도 모른다. 위원장님께서 여쭤보셨으니 굳이 말씀드리면, 최근에 부천 쪽에서 정치적인 내용을 담은 작업이 선정된 일로 조금 이슈가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사업 취지가 공적이고 다수의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니, 내년에도 사업을 이어가는 입장에서는 너무 정치적이거나 상업적이거나 선정적인 것은 조금만 고려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물론 의무는 아닙니다.

이 예의바른 말에는 숭숭 구멍이 뚫려 있다. 정치적인 것과 상업적인 것과 선정적인 것은 무엇이며, 누가 판단하는가. 그것들로부터 시민을 ‘보호할’ 의무나 자격이 그들에게 주어졌는가. ‘순수한 공모전을 정치 오염 공모전으로 만들었다’는 장관의 말에서 ‘순수한’은 무엇이고 ‘오염’은 무엇인가. 예술은 순수한 것이며 정치적 요소를 넣으면 오염되는 것인가? 예술의 역사는 정치적 긴장감이 거세되었기 때문에 오염되어버린 예술들로 가득하다. 즉 이 말들은 모두 비평적 검토 없이는 쓸 수 없는 뒤틀린 언어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비평이 있어야 할 자리에 행정의 조악한 언어가 활개를 친다.

그러나 위원들은 고민할 것이다. 소중한 지원 사업이 혹시 줄어들면 어쩌나. 조금 망설여질 때만 ‘덜 정치적인’ 것을 지원하면 어떨까. 고작 이 정도 편향으로도 심사 결과는 많이 달라진다. 발표를 접한 작가들 역시 못 느낄 리 없다. 그들은 계획하는 작업들 중 ‘덜 정치적으로 보이는’ 것을 먼저 하겠다고 마음먹는다. 지원을 총괄하는 장관이 부정적인 말을 꺼낸 상황에서 굳이 정치적 작업으로 복잡한 서류를 쓸 필요가 있을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강력한 지시가 오가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결국 우리의 예술은 예전보다 훨씬 덜 정치적인 것이 된다. 권력의 언어가 예술의 생태계를 심각하게 오염시키는 중이라는 것 말고는, 이 상황을 설명할 언어가 내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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