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어서는 안 될 말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선명하게 기억나는 순간들이 있다. 치과 대기실에서 내 차례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TV를 등지고 앉았는데, 맞은 편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TV에 집중된 것을 깨달았다. 몸을 돌려보니 화면 속에서 커다란 배가 기울어지며 가라앉고 있었다. 세상에 저렇게 큰 배가? 수학여행 가던 학생들이라고? 어떡하지? 하지만 걱정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빨간 바탕에 커다란 흰색 글자, 탑승객 전원이 구조되었다는 속보 자막이 흘러갔기 때문이다. 아유, 그럼 그렇지. 저 고등학생들, 오늘 저녁에 무용담 자랑 엄청나겠네. 그러고는 진료실로 들어갔다. 현실을 알게 된 것은 치료를 마치고 지하철로 이동해 일터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8년 전 일이지만, 그 순간의 느낌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분노도 슬픔도 아닌, 그냥 ‘얼음’이었다.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4주 전 주말 저녁, 바로 이 코너의 글을 쓰느라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휴대전화에 재난 알림 메시지가 떴다. 코로나19 이후 재난 알림 문자에 둔감해졌지만, 이날은 달랐다. 오전에 요란한 경고음과 함께 괴산의 지진 발생 알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 무슨 일? 이태원에서 심정지 환자가 다수 발생했단다. 아무 설명도 없었다. 불이 났나? 혹시 가스 유출? 건물 붕괴? 얼른 트위터에 접속했다. 그리고 영화에서조차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을 보았다. 전쟁터도 아니고, 병원 응급실도 아닌, 서울 시내 한복판 도로 위에 여기저기 사람들이 쓰러져 있고 ‘단체로’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다. 때마침 바깥에서는 다급한 구급차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저 구급차들이 바로 이 작은 화면의 흔들리는 영상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참이었다. 초현실적이었다.

참사가 발생하던 두 순간의 기억이 충격의 스냅샷이라면, 이후의 수습 과정은 놀라움과 분노, 통탄의 롤러코스터였다. 진상조사를 통해 책임자를 처벌하고, 피해자에게 위로와 보상을 제공하고, 비슷한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제도를 정비하는 것. 당연한 수순이지만, 이것이 말도 안 되게 어려워지면서 피해자들에게는 또 다른 ‘고통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기억을 돌이켜보자. 세월호 유가족들은 이 당연한 것을 위해 정치인에게 무릎 꿇고 사정했다. 거리에서 노숙도 했고 물대포도 맞았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어떤 유족이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을까. 하지만 정부와 의견을 나눌 수 있는 통로가 차단되고 정부의 은폐와 책임회피가 계속되면서, 이들은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되자마자 ‘순수성’을 의심받았다. 게다가 보상과 관련한 거짓 정보는 피해자들을 분열시켰고, 시민들이 피해자를 비난하도록 만들었다. 당시 여당 정치인들은 이를 제지하기는커녕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태원 참사 이후 정부는 유가족들이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아픔을 공유할 수 없게 만들었다. 뿔뿔이 흩어져 있으니, 정부와 만나 추모 절차나 진상규명에 대한 집단적 의견도 제시할 수 없다. 아마도 세월호 참사에서 얻은 그들만의 교훈이리라. 정부는 갑자기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하면서도 굳이 ‘참사 희생자’를 ‘사고 사망자’로 부르게 했다. 그러면서 참사의 책임은 아래로 아래로 내려보내는 중이다.

“가장 큰 치유의 약은 뭐냐, 딱 하나라고 보거든요, 죽은 건 어쩔 수 없는 거야. 정말로 안타까운데, 그 죽음으로 인해서 이렇게 세상이 바뀌었고 당신 자녀의, 이웃의 죽음이 그렇게 헛되지 않았어. 우리는 이렇게 기억할 것이고 이렇게 바꾸었어, 라고 하는 게 가장 큰 선물일 거 같아요. 그게 지금 안 되는 거예요, 왜 죽었는지도 모르겠어, 사방이 나를 지금 방해하고 있어, 거기서 무슨 치유가 된다는 것은 사실은 웃기는 거죠. 지금도 때리고 있으면서 약 먹으라고 하는 것과 똑같아요.” 세월호 관련 연구를 하면서 2015년에 만났던,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 사건 유가족의 말이다. 2022년의 유가족이 다시 이런 말을 하게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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