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의 영혼 보호법’이 필요한가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강준만의 화이부동] ‘공무원의 영혼 보호법’이 필요한가

“간단한 불복종, 예컨대 단순히 관습에 무릎꿇기를 거부하는 것도 하나의 의무이다.” 영국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의 말이다. 그는 반대자와 이단자를 옹호하며, “희생물에 일제히 달려드는 떼거리에 대한 증오”를 표명했다. 그러나 세상은 밀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진 않았다. 20세기의 세상은 오히려 정반대의 방향으로 치닫기도 했다. 절대적 복종을 요구하면서 획일화를 찬양한 파시즘 체제의 등장은 인간이 군집행동을 하는 동물과 크게 다를 게 없으며, 훨씬 더 잔인한 동물이기도 하다는 걸 웅변해 주었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는 복종의 이유를 설명할 때 “너는 복종해야 하기 때문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했으며, 독재 치하에서 살던 이탈리아인들은 “무솔리니는 항상 옳다”는 말을 들으며 살아야 했다. 그 결과는 알고 있는 바와 같다.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벌어진 파시즘 광기의 비극에 대해 영국의 과학자이자 작가인 C P 스노는 “인간의 길고 어두운 역사를 돌이켜 보면, 반란이라는 이름보다 복종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진 끔찍한 죄악이 훨씬 더 많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프랑스 작가 조르주 베르나노스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는 “만약 인류의 파괴 기술이 점점 더 발달해서 언젠가 인류가 이 지구상에서 사라진다면, 그 멸종의 원인은 인간의 잔인성 때문이 아니다. 그 잔혹함이 일으킨 분노, 그리고 그 분노가 가져올 보복 때문은 더욱 아니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 일반 대중의 온순함과 책임감의 결여, 그리고 모든 부당한 명령에 대한 비굴한 순종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끔찍한 일들, 또 앞으로 일어날 더욱 전율할 만한 사건의 원인은, 이 세상 여러 곳에서 반항적이고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의 수가 늘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온순하고 순종적인 사람의 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엉뚱하게도 영국 작가 필립 쇼트의 마오쩌둥 전기를 읽다가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누구나 다 알 법한 뻔한 이야기이지만, 정치적 거물의 경험담이라는 점에서 새롭게 다가오는 힘이 있다. “내가 공개적으로 반항하면 아버지가 누그러졌지만, 내가 약하고 복종하는 태도를 보이면 아버지는 나를 더 때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오쩌둥은 13살 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어느 날 아버지가 손님을 여러 명 집으로 초대했다. 그날 나는 손님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와 말다툼을 벌였다. 아버지는 사람들 앞에서 내가 게으르고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욕을 했다. 나는 엄청나게 화가 났다. 나는 아버지에게 욕을 하고는 집 밖으로 나와버렸다.”

서해 공무원 피살은 ‘복종의 독배’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던가? “아버지는 나를 따라오면서 욕을 퍼붓고 어서 집에 들어오라고 명령했다. 나는 연못가에 이르러서 더 가까이 오면 연못에 뛰어들겠다고 아버지를 위협했다. … 아버지는 잘못을 사죄하고 복종의 의미로 땅에 머리를 대고 절하라고 말했다. 나는 아버지가 날 때리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한쪽 무릎만 꿇고 절을 하겠다고 대답했다.”

웃음을 자아내게 만드는 맹랑한 도발이었지만, 아버지의 폭력을 억제하는 큰 효과를 보았다고 하니 마오쩌둥의 슬기로움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렇게 아버지의 강압적인 복종 요구에 당당히 저항했던 소년이 성인이 되어 권력을 쥐자 중국 인민의 복종을 위해 문화대혁명이라는 희대의 폭력극을 벌인 걸 어찌 이해해야 할까? 자신처럼 공개적으로 반항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그랬던 걸까? 참으로 안타까운 비극이라 아니 할 수 없겠다.

그럼에도 폭력을 줄이는 데엔 약하고 복종하는 태도보다는 공개적 저항이 훨씬 낫다는 그의 말은 옳거니와 사회 전반에 걸쳐 적용할 수 있는 원칙으로도 손색이 없다. 특히 공무원과 정권의 관계에서 필요한 원칙일 게다. 불법을 저지르는 정권이 공무원에게 부당한 명령을 내릴 때에 공무원은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가? 오늘날 한국에서 “그렇다”고 답할 사람은 없을 게다. 하지만 그건 이론일 뿐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다.

2017년 8월 대통령 문재인은 취임 후 처음으로 부처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공직자는 정권에 충성하는 사람이 아니다”라며 “공직자는 국민과 함께 깨어 있는 존재가 돼야지, 그저 정권의 뜻에 맞추는 영혼 없는 공무원이 돼선 안 될 것이다”라고 했다. 아름다운 말이었지만, 이는 ‘영혼 없는 말’이었다는 게 곧 드러나고 야 만다.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 사태 덕분에 집권한 문재인 정권은 처음엔 공무원의 영혼 문제와 관련해 야심만만했다. “공무원은 직무를 수행할 때 소속 상관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고 돼 있는 국가공무원법 57조를 “직무상 명령이 위법한 경우 복종을 거부해야 한다”로 개정하려 했다. 대통령이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의결까지 받은 인사혁신처의 개정안은 “상관의 명령이 명백히 위법한 경우 이의를 제기하거나 따르지 않을 수 있으며 이로 인하여 어떠한 인사상 불이익도 받지 않는다”는 문구를 57조에 추가했다.

그러나 문 정권은 이상에만 치우쳐 현실 감각이 박약한 정권이었으며, 이 개정안 역시 그런 한계로 인해 곧 사라지고 말았다. 명령이 위법한지를 누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위법의 경계선상에 놓여 전문가들조차 의견의 일치를 보기 어려운 명령이라면 약자의 위치에 있는 공무원이 무슨 수로 이의를 제기하거나 따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명령에 따르지 않음으로써 받게 될 인사상 불이익이 시차를 두고 우회적으로 교묘하게 이루어진다면 피해자는 무슨 수로 피해 회복을 꾀할 수 있단 말인가?

정치인부터 영혼 회복하는 게 순리

개정안은 아마도 이런 의문들에 답하는 게 쉽지 않아서 사라졌겠지만, 동시에 정권의 입장에서도 공무원의 무조건 복종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이익을 포기할 수 없다는 정략적 사고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현시점에서 돌이켜 보자면 그 유혹에 굴복한 것이 독약이 되었다는 게 점점 분명해지고 있지만 말이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도 바로 그런 경우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당시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었던 김종인은 “이번 만행은 북한군이 비무장 상태의 우리 국민을 총살하고 시신을 끔찍하게 화형시킨 패륜적 무력도발”이라며 “행여나 문재인 정부가 느닷없이 북한의 전통문과 진정성 없는 면피성 사과로 이번 사태를 덮으려 한다면 정권의 무덤을 스스로 파는 자해행위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2년3개월 후에 벌어질 일을 내다본 김종인의 선견지명이 놀랍다. 물론 앞으로 더 두고봐야 하겠지만,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서훈의 구속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충격적이다. 관련 공무원들이 부당하거나 미심쩍은 명령을 거부했더라면 그게 바로 문 정권을 살리는 길이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 거부는 극소수 ‘영웅’에게나 가능한 것이지 보통의 공무원에겐 기대하기 어렵다는 걸 말이다.

그게 우리의 현실이요, 문화임을 인정하는 게 좋겠다. 이걸 인정하고 들어가야 올바른 해법을 모색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사실 복종보다 무서운 건 순응이다. 형식적인 권위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복종이라면, 순응은 집단 내의 분위기만으로도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순응은 반복되면 체질로 굳어져 무조건적이고 자발적으로 작동한다. 순응을 할수록 요구하는 순응의 강도는 높아지게 돼 있다. 앞서 언급한 마오쩌둥의 도발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거야 부자(父子) 관계에서나 가능한 게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맞다. 조직에서 그런 위험 감수를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불복종의 위험을 분산시키는 연대의 방안을 설계하고 이걸 공론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윤석열 정권이 정정당당하게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을 대하고 있다면,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공무원의 영혼에 대한 깊은 관심이다. 법적 보장도 좋겠지만 동시에 문화를 바꾸는 시도를 해야 한다. 정권 내에서 복종과 순응을 요구하면 안 된다. 그건 자기모순이다. 여당이 전당대회를 앞둔 상황에서 경선 룰을 바꾸고 그걸 곧장 적용하겠다는 건 더더욱 안 된다.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정치인들부터 영혼을 회복해야 공무원들에게 영혼을 돌려주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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