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정치인들은 성찰에 인색할까

[강준만의 화이부동] 왜 정치인들은 성찰에 인색할까

“민주주의에서 정치인을 비판하는 것은 우리 자신들을 비판하는 것과 같다는 점을 기억하자. 우리의 수준이 곧 우리 정치인들의 수준이다.”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말이다. 내심 이 말에 동의할 사람들은 많겠지만, 동의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할 사람은 드물 게다. 매우 위험한 말이기 때문이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정치는 4류,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라는 주장을 떠올려 보시기 바란다. 삼성 회장 이건희가 27년 전에 한 말이다. 이 발언이 당시 김영삼 정권을 화나게 만들어 삼성이 한동안 바짝 긴장하기도 했다는 말이 돌기도 했지만, 일반 시민들 중엔 동의하는 이들이 많았다. 아마 지금 물어봐도 동의하는 사람들이 다수가 아닐까 싶다. 일반 시민이나 언론인이나 지식인이 “정치는 4류”라고 말하는 건 전혀 위험하지 않다. 정치가 늘 우리를 실망시키고 화나게 만드는 건 분명한 사실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수준이 곧 우리 정치인들의 수준이라는 이유로 “국민은 4류”라는 말을 보탠다고 생각해보라. 돌 맞기 십상이다. 국민은 성역이다. 물론 유권자도 성역이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유권자들이 정치인에게 미치는 부정적 영향에 대해서조차 유권자 탓은 하지 못한 채 정치인들에게만 책임을 묻는 이상한 게임을 하고 있다.

“1조, 고객은 항상 옳다. 2조, 고객이 틀렸다고 생각되면 1조를 다시 보라.” 미국의 대표적인 소매유통업체인 월마트가 내세운 이 슬로건은 ‘소비자 지상주의’의 정수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른바 ‘소비자 갑질’이 사회적 문제가 되면서 ‘소비자 지상주의’의 위세는 한풀 꺾였지만, ‘유권자 지상주의’는 건재하다. 특히 유권자들의 관심을 먹고 살아가는 언론은 “1조, 유권자는 항상 옳다. 2조, 유권자가 틀렸다고 생각되면 1조를 다시 보라”는 슬로건을 실천하는 데에 앞장서고 있다.

문제는 늘 유권자의 대표성이다. 정치인과 정당에 강한 지지를 보내는 대신 적극적인 요구를 하는 유권자는 소수이지만, 이들은 사실상 다수인 것처럼 행세하며 실제로 그런 대접을 받는다. 이런 유권자들은 상대편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분노와 증오에 의해 추동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극단적 대결 구도와 공격, 일방적인 압승을 선호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강성 유권자들이 정치인 성찰 방해

현재 한국 정치는 바로 그렇게 왜곡된 ‘유권자 지상주의’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이 틀 안에선 합리성, 국익, 타협, 협치, 화합을 추구하는 정치인이 설 땅은 없다. 이런 정치인은 늘 전투성을 앞세운 강성 유권자들의 공격과 탄압의 대상이 된다. 거물로 크려면, 아니 공천이라도 받으려면, 이런 강성 유권자들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 아니면 적어도 그들이 크게 반발할 언행은 삼가야 한다.

강성 유권자들은 자기 정당이 잘되기를 바라긴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자신의 분노와 증오를 발산하는 것이다. 그들은 성찰을 혐오한다. 성찰은 분노와 증오의 발산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들 때문에 자기 정당이 실패하는 일이 벌어져도 그걸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왜 정치인들은 성찰에 인색할까?”라는 물음에 대해 내 나름대로 찾은 답이다. 좀 과장되게 표현하긴 했지만, 내 주장의 요지는 정치인의 성찰을 방해하는 주요 이유는 사실상 정당을 지배하는 강성 지지자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국무총리와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지낸 이해찬이 최근 출간한 <이해찬 회고록: 꿈이 모여 역사가 되다>를 읽으면서 해본 생각이다.

이해찬 정도의 정치적 거물이라면 지난 대선의 패배에 대해 성찰을 하면서 강성 지지자들에게도 쓴소리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지만, 이 책 어디에도 성찰은 없었다. 출판기념회 등 출간 후 행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해찬은 성찰을 모르는 정치인인가? 그럴 리 없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게다. 나는 그 이유를 전 민주당 의원 금태섭이 최근 쓴 신문 칼럼에서 찾을 수 있었다. 금태섭은 민주당 의원 시절 민주당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법원 판결을 비난하면서 판사에 대한 인신공격까지 하는 등 매우 위험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을 때 지도부 의원에게 한 시간 이상 그러면 안 된다고 간곡한 호소를 했다고 한다. 이 호소를 단호하게 거절한 그 의원이 내세운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은 지지자 마음을 달래줄 때”라는 것이었다. 이해찬도 자신의 회고록을 대선 패배로 인해 상처받은 지지자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데에 바치기로 했던 것 같다. 관련 대목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해찬은 지난 대선이 “한국 사회 최고 엘리트의 기득권 카르텔이 모든 분야에서 작동한 선거였다”는 평가에 수긍하면서 이런 견해를 덧붙인다. “전형적으로 (법무부 장관) 한동훈 같은 인물이 그 카르텔의 중심에 서게 됐어요. 검찰, 언론, 관료 집단을 부유층, 기득권층의 2세들이 다 차지해 가고 있고 … 얘기를 들어 보니 강남 3구 출신, 특목고 출신, SKY 대학 출신들이 공무원 사회의 주류를 이루게 됐다고 하더구먼. … 우리 사회 장래로 볼 때 굉장히 나쁜 거예요. 보수적인 엘리트 카르텔이 각 분야를 좌지우지할 테니까.”

동의할 수 있는 점이 없진 않은데, 매우 이상한 말씀이다. 강남 3구 출신, 특목고 출신, SKY 대학 출신들이 고위 공무원직의 주류를 이룬 건 문재인 정권에서도 똑같았는데, 왜 그땐 잠자코 있다가 이제 와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 진보 정권하에선 그들이 진보적인 엘리트 카르텔로 변하는가? 그러니 괜찮다는 뜻일까? 그런 식으로 출신 성분을 따지자면 민주당 정치인이나 국민의힘 정치인이나 별 차이가 없다는 것도 세상이 다 아는 일일 텐데, 이 또한 대통령이 진보면 문제될 게 전혀 없다는 걸까?

성찰이 넘치는 회고록을 보고 싶다

싸움 붙이기를 좋아하는 기자들이 한동훈에게 ‘기득권 카르텔의 중심’이라는 이해찬의 주장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그는 “저는 지난 20여년간 부패 정치인이나 비리 재벌, 투기자본 깡패들과 손잡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일관되게 국민 편에서 맞서 싸워왔다”면서 “이 나라의 진짜 기득권 카르텔은 운동권 카르텔이라고 많은 국민들이 생각하실 것”이라고 답했다.

뭐 썩 좋은 대답은 아닐망정, 틀린 말은 아니다. 출세한 운동권 기득권 카르텔의 위세와 폐해에 대해선 그간 진보 진영 내에서도 많은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는 걸 이해찬도 잘 아실 게다. 왜 이 카르텔에 대해선 아무런 말씀도 없는 걸까? 민주당 대표 시절 이해찬은 ‘20년 집권론’을 내놓았고, 이어 ‘50년 집권론’을 주장하더니, 2019년 2월엔 ‘100년 집권론’까지 내놓음으로써 사실상 그런 진보 카르텔의 영속화를 주장한 장본인이 아니었던가?

그런 오만함은 문재인 정권 전반에 널리 확산되었는데, 이게 지난 대선의 결정적 패인이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오죽하면 회고록 출간 직후 민주당 6선 의원 출신의 전 국회부의장 이석현이 “이해찬 전 대표가 발언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한다”며 “또 무슨 말로 국민의 속을 긁을 것인가 우려된다”고 밝혔을까. 그는 “민주당이 20년 집권해야 한다고 말씀할 때도 깜짝 놀랐다”며 “민주당이 석권할 때라서 겸손해야 할 때인데 자만해서 국민의 견제심리만 키웠었다”고 했다. 또 그는 “대선 패배가 절박감 부족? 한동훈 때문? 당원 상처 덧날라”라며 강한 우려를 표했다.

이해찬이 “이재명 후보는 너무 아까운 후보”라며 검찰과 언론의 불공정성을 비난한 것도 문재인 정권의 전형적인 ‘남 탓’으로 여겨져 안타까웠다. 최근의 출판기념회에선 “5년 금방 간다”며 ‘민주당 20년 집권론’을 다시 꺼내든 것은 보기에 민망했다. 이어진 토크쇼에서 ‘대선 패배’에 관련된 질문을 받은 그는 “(보수와 진보의 현실에 대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건 현실을 안이하게 생각하는 거다”라며 “(진보 측은) 벼랑 끝에 있다. 여기서 놓치면 나락이다”라고 했다. 이는 안타까움과 민망함을 넘어 참담하다는 생각마저 갖게 했다.

왜 민주당은 자꾸 ‘남 탓’만 할까? 잘못한 일은 전혀 없었나? 지난 5년간 무슨 일을 했길래 정권을 잃었는지 그걸 성찰하는 일부터 먼저 해야 할 게 아닌가. 도대체 민주당엔 반대편을 겨냥한 ‘증오 마케팅’ 외에 무슨 메시지가 있는가? 이 나라가 정녕 이런 식으로 흘러가도 괜찮은 건가? 성찰이 흘러넘치는 회고록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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