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치밀하고 친절한 적, 소선거구제

구혜영 정치에디터

나경원 전 의원이 결국 전당대회 출마를 포기했다. 그가 끝까지 돌파하길 원했다. 검찰 정권이 정치를 만만하게 대하지 않길 바랐고, 권력의 완력에 무너진 여당 전대가 제자리를 찾길 바랐다. 팜파탈이나 여장부 아니면 버티기 어려운 여성 정치도 성장하길 바랐다. 그러나 그는 주저앉았다.

구혜영 정치에디터

구혜영 정치에디터

나경원 사태는 유신 시절 ‘코털 사건’을 연상케 한다. 1971년 야당이 오치성 내무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통과시키자 박정희 대통령 명령을 받은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김성곤 공화당 의원 등의 코털을 뽑아버린 사건이다. 전직 대통령 박근혜씨의 유승민 원내대표 제거 사건도 있었지만 나경원 사태는 그때와 비견할 수 없는 막장 드라마다. 권력의 탄압을 넘어 여당 전체를 집단적으로 줄 세운 모습은 정당 민주주의 붕괴라 불러도 될 만하다. 한 정당 안에서도 내 편 아니면 적으로 구분짓는 현상이 심각해졌다. 정치 전반적으로 혐오와 불신이 구조화된 상황에서 총선이 1년 앞으로 다가왔다. 집권여당 전체가 공천이라는 권력의 불심검문에 속수무책으로 걸려들고 말았다.

대통령이 여당 정치에 관여할 수는 있다. 다만 민주적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전제가 중요하다. 대통령과 당이 동등한 위치에서 의견을 주고받는 게 삼권분립 취지에도 맞는다. 그러나 여당 전당대회는 룰 변경, 임명직 ‘해임’ 등 권력의 꼼수 개입이 난무했다. 여당 초선 의원 50여명은 권력 친위대를 자처했다. 보수를 대표하는 중진에게 “정치적 사기”라고 공격하는 충격적인 장면도 등장했다. 정권 초반 대통령 힘이 막강할 때 치러지는 총선에서 공천 눈도장 찍기에 나선 것이다. 총선 때마다 초선 60~70%가 물갈이되는 국회가 반복되지만 교체 지수가 높을수록 정치의 퇴행 속도는 그만큼 빨라졌다.

초선 여성 의원들은 돌격대를 불사했다. 최고위원에 도전한 전직 여성 의원은 무릎까지 꿇고 “대통령을 지키겠다”고 호소했다. 초선 쿠데타를 주도한 것도 여성 의원이라고 한다. 정국 혼란기면 유난히 여성 의원들의 과잉 행동이 도드라진다. 여성은 다수지만 여성 정치인은 대표적인 정치적 소수라서다. 남성적 질서가 지배하는 정치판에서 생존을 걱정해야 하고, 선거 시기엔 남성들보다 더 민감하게 권력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중진 의원들도 보이지 않는다. 선당후사, 타협과 조정은 선수로만 말할 수 없는 중진 정치의 권위를 가리킨다. 중진연석회의를 비롯해 탄핵 당시 대통령 퇴진을 건의한 새누리당 상임고문단, 분당 과정에서 문재인 대표에게 비상대책위원회를 제안한 새정치민주연합 중진들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나경원 사태에선 ‘다선’은 있고 ‘중진’은 없었다. 여당 중진들은 윤핵관을 제어하지도 않았고, 제어할 만한 정치력도 없었다. 오히려 정치생명 연장을 위해 권력의 심기를 더 세심하게 살피는, 부끄러운 어른 노릇을 불사했다.

좋은 정치를 ‘꿈’꾸는 것마저 도전이 필요한 지경까지 왔다. 좋은 뜻과 좋은 사람만으론 좋은 정치가 불가능하다는 게 확인되고 있다. 정치의 악마적 요소를 통제하기 위해서라도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때마침 시스템을 바꾸라는 경고음이 켜졌다. 대통령도 중대선거구제를 언급했다. 중대선거구제가 되면 초선 의원들도 소신 정치를 할 수 있다. 2등 안에만 들면 지도부에 밉보여도 당당해진다. 여성 정치도 여성보다 더 약자인 소수자 대표성을 인식하는 정치가 자리잡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대통령을 지키겠다며 무릎 꿇는 일도 사라질 것이다.

선거제를 바꾸면 중진들도 긴장하게 된다. 소선거구제에선 인지도를 앞세워 신인들을 제압했지만 4~5인 지역구에선 내부에서도 경쟁해야 한다. 그간 영호남 다선 의원들이 큰 정치인으로 인정받지 못한 이유도 일당독재 소선거구제 때문이다. 공천만 받으면 당선되는 지역의 중진들은 선수를 쌓아봐야 골목대장 이미지를 피하지 못했다. 큰 꿈을 꾸는 중진들은 수도권을 다음 승부처로 택했다. 대선 주자로 도약하려면 수도권에서 당선돼야 한다는 이유였다. 소선거구제는 이처럼 수도권 정치 강화에도 한몫했다.

물론 중대선거구제가 좋은 정치를 위한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하지만 정치가 달라질 수 있다면 뭐라도 해야 할 때 아닌가.

소선거구제는 87체제 이후 36년 동안 정치 곁에 머물렀다. 정치는 병들어갔다. 이젠 갈라서야 한다. 나경원 사태가 지난 세월 그토록 치밀하고 친절했던 소선거구제에 이별을 선언하는 최후통첩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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