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만적 승부수와 ‘반집싸움’

김민하 정치평론가

한때 ‘승부사 기질’은 한국의 정치인이라면 꼭 갖춰야 할 덕목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요즘 정치를 볼 것 같으면 승부사의 시대는 가고 ‘반집싸움’의 시대가 온 것 같다. 한 수라도 잘못 두면 지는 것처럼 하는 정치가 대세다.

김민하 정치평론가

김민하 정치평론가

민주당이 이재명 대표에 대한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에 대응하는 모습도 그렇다. 대의명분을 움켜쥔 채 승부수를 던지는 선 굵은 대응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밀리면 끝장이라는 식이다. 나름 절박함이겠지만, 밖에서 볼 때는 손익 문제다. 제기된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상세히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면서 정면돌파하기보다는, “검찰의 소설”이라는 수사(修辭)에 기대, 과거의 해명을 반복하면서 구체적인 논리 공방은 법정에서 벌이는 게 낫다는 계산 아니냐는 거다.

반대로 대통령은 자꾸 승부수를 던진다. 주요 당권주자를 주저앉히거나 공격한 것을 보라. 신당창당설, 탈당설, 탄핵설도 대통령의 의중에 없는 얘기가 나왔다고 보기 어렵다. 대통령이 사실상 최전선에 직접 나섰다는 점에서, 이것은 승부수다. 승부수가 너무 많아서 조선일보 주필이 “처음 겪어보는 대통령”이라며 “더 이상은 곤란하다”라고 쓸 정도이다.

최근 대통령의 또 다른 승부수는 은행과 통신의 과점 문제를 제기한 거다. 은행과 통신의 행태에 문제가 없다고 보는 사람은 없다. 다만 은행을 더 만든다고 해서 ‘성과급 잔치’가 없어질 리 없고, 이동통신사가 하나 더 생긴다고 통신요금 부담이 경감된다는 보장도 없다. 과점 해소를 어떻게 할 것인지 잘 기획된 정책적 대안을 염두에 두고 한 발언도 아닌 거 같다.

대통령은 왜 그랬을까? 두 가지 가능성이다. 첫째, 대통령은 널리 알려진 대로 자유시장과 경쟁원리의 열렬한 지지자이다. 대통령은 부처 업무보고 등에서도 자유롭게 발언을 해왔는데, 마찬가지의 소신 표명일 수 있다. 두 번째는 이른바 ‘민생 드라이브’다. 난방비 부담으로 열 받는데 대통령은 뭘 하는지 검색해보면 순 전당대회 얘기뿐이다. 민생을 챙기는 모습이 필요하다. 그래서 공공요금을 상반기 동결하기로 했다. 은행 역시 사회공헌 지출을 늘리고 통신사도 한 달간 데이터를 추가 제공하는 걸로‘민생 드라이브’에 호응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말은 무겁다. 이 정도론 안 된다. ‘과점’을 해소하는 가시적 방안이 있어야 한다. 당장 정부 기관들은 분주하다. 이런 광경은 또 하나의 권위주의적 통치 사례로 느껴진다.

여기에, 대통령의 의도가 ‘민생 드라이브’의 연출에 있다면 이거야말로 포퓰리즘이다. 그런데 ‘권위주의’와 ‘포퓰리즘’은 보수정치가 전 정권을 비난한 핵심 키워드다. ‘내로남불’일까? ‘내로남불’ 비판은 정치적 문제를 개인화한다. 그러나 이건 정치의 구조 문제다.

대통령의 발언은 결국 새로운 은행이나 통신사를 맡게 될 대기업이 이익을 챙기는 결말로 이어질 것이다. ‘포퓰리즘’의 승부사적 어법으로 기득권의 이익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 ‘승부사 정치’는 기득권에 도전하는 과정에 대의명분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대중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하여 고안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의 승부수는 기만적이다.

반면 ‘반집싸움’ 정치는 원래 ‘승부사 정치’가 갔어야 할 길의 포기라는 점에서, 기득권 정치 문법으로의 회귀라고 볼 수 있다. 민주당은 바로 이 문법으로 검찰을 비롯한 기득권에 저항하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 정치는 ‘포퓰리즘에 반대하는 포퓰리즘을 구사하는 엘리트’와 ‘엘리트를 반대하는 엘리트 정치 문법을 구사하는 포퓰리스트’의 적대적 공생 관계 속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이런 해법이 지금 시대에 맞다고 본다. 이런 기만적 정치 구도하에서 “너는 엘리트의 편인가, 민중의(popular) 편인가?”라는 고전적 질문은 무력화된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우리 정치의 ‘구조적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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