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정책을 반대하는 정부

지난주 통계청이 2022년 인구동향 통계를 발표한 후 출산율 문제가 또다시 뉴스를 뒤덮고 있다. K출산율은 몇 년째 세계기록을 갈아치우는 중이다. 이쯤 되니 과연 어디까지 내려갈 것인가 손에 땀을 쥐고 신기록 레이스를 지켜보게 된다. 이렇게 경쟁자 없는 레이스를 펼치는 동안 정부가 손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책을 수도 없이 내놓았고, 16년 동안 지출한 예산도 280조원이 넘는다. 이 정도면 세금 낭비나 배임 혐의로 전방위 ‘압수수색’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지만, 다들 바쁘시니 그건 어려울 것 같다. 통계청 발표 이후 대통령실은 ‘백화점식’ 정책을 지양하고 효과가 있는 정책에 집중하겠다고 했다. 지난 20년을 돌이켜보면 처음 듣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쨌든 잘되었으면 좋겠다.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집행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집행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그러나 사례로 든 정책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자녀 돌봄과 병행할 수 있도록 다양한 형태의 재택근무를 활성화하겠다는 것 말이다. 재택근무는 집에서 회사 업무를 한다는 것이지, 집에서 내 마음대로 시간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코로나19 유행 동안 재택근무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디지털 노동감시 문제도 같이 부상했다. 회사는 집에 있는 노동자가 사내 메신저에 접속해 있는지, 업무용 노트북의 클릭이 중단되지 않는지 모니터링하고, 심지어 근무지 이탈 여부를 GPS 기술을 통해 감시하기도 했다.

이런 치밀한 감시 없이 일정한 산출물만 만들어내면 되는 이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낮에 아이를 돌보거나 집안일을 하는 시간만큼 다른 시간, 이를테면 잠자는 시간을 쪼개서 업무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돌봄과 가사노동 자체의 부담이 덜어지지 않는 이상, 재택근무는 그나마 분리되어 있던 회사 업무와 집안일을 동시에 해야 하는 이중 부담을 늘릴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부담은 보통 여성의 몫이다. 코로나19 유행 시기의 재택근무가 여성 노동자에게 불균등한 부담을 초래했다는 연구 결과도 이미 여럿이다.

어느 분야보다 자율성이 높은 학계에서조차 상황은 비슷하다. 코로나19 시기를 지나면서 국제적으로 여성 연구자들의 논문 출판과 연구비 수주 규모가 크게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어린 자녀가 있는 초기 경력의 연구자에게 더 치명적이다. 현재의 신체적·정신적 부담만이 아니라, 앞으로의 경력 전망에도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박근혜 정부 시절, 일·가정 양립을 내세우며 ‘경력단절 여성 등 전일제 근무가 곤란한 사람’을 위해 시간선택제 공무원 임용 제도를 도입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부족한 인력으로 아슬아슬하게 돌아가는 K일터에서 근무시간을 자유롭게 선택하기는 쉽지 않았다.

또한 팀원으로서 소속감을 느끼기도, 경력 개발을 하기도 어려웠다. 제도 시행 5년이 되지 않아 절반 넘는 인력이 떠났고, 정부도 채용 규모를 줄이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모두의 노동시간을 줄이고 일자리를 나눈다면, 고용률은 높아지고 노동 강도는 훨씬 낮아져서 남녀를 불문하고 일·가정 양립이 훨씬 쉬워질 것이다. 일터에 사람 여유, 시간 여유가 있어야 아파도 쉴 수 있고, 급한 집안일로 조퇴하는 것도 가능하다. 국내외의 주 4일제 근무 실험은 노동생산성도 높아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정부의 선택지에 없다.

오히려 노동시간을 늘리는 기이한 노동개혁에 매진 중이다. 대체 어느 평행우주인지 모르겠으나, 더 오랜 시간 일하지 못해 속상해하고, 겨우 11시간 연속 휴식 정도는 없어도 일주일에 64시간 노동을 거뜬히 해내는 ‘철의 노동자’들로 가득 찬 그곳에 정부의 영혼이 사로잡혀 있다.

한쪽에서는 일·가정 양립을 촉진하겠다고 분주한데, 다른 쪽에서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노동시간 연장에 매진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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