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규의 외교만사] 오호통재라

오호통재((嗚呼痛哉)라! 2023년 3월6일은 대한민국 외교사상 가장 고통스럽고 통탄할 날이다. 윤석열 정부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 지속해 온 역사 문제, 전쟁 성노예 문제, 일제 징용 피해 보상 문제 등 일본과의 갈등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백기 항복을 선언했다. 일본의 역사적 책임, 배상, 보상 여부에 대한 논란과 그간의 외교적 과정은 불문하고 관계 개선을 우선적으로 추진하겠다는 단호한 언명이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이에 숨죽이고, 일부 당파적 지식인들은 벌써 박정희 대통령이 단행한 일본과의 국교 수교와 같은 역사적 결단 혹은 시대적 소명을 담았다고 찬양하기까지 한다. 윤석열 대통령도 이 해법을 “미래지향적 한·일 협력을 위한 결단”이라고 했다.

김흥규 아주대 미중정책연구소 소장

김흥규 아주대 미중정책연구소 소장

3월6일에 나온 해법으로, 한·일관계와 관련한 ‘고르디우스의 매듭’이 과연 풀리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협력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일부에서 우려하는 바와 같이 미·일 동맹의 종속국, 혹은 ‘망국으로 가는 길’에 우리는 들어선 것일까? 아직 그 결말을 이야기하기에는 이를지도 모른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간 한국 정부가 매달려 온 한·일 관련 주요 분쟁들이 한국의 일방적인 백기 항복, 일본 외교의 완벽한 승리로 결말지어졌다는 사실이다. 이 길이 대한민국의 생존 혹은 보다 나은 길로 가기 위한 일순간의 고통과 치욕을 감내하는 역사적 결단이 될지는 아직 아무도 확신하지 못한다. 이 순간은 분명 이 치욕과 고통의 날에 대한 참회와 반성이 필요한 시간이다. 어찌 이러한 사태에 이를 정도로 내몰렸을까? 환호작약할 시간은 분명 아니다. 환호작약하는 이들이 지성사를 지배한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이 참사는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일단은 한국 외교의 가벼움이다. 김대중 대통령 이후 우리 역대 정부는 대부분 국제관계나 외교를 가벼이 취급했다. 종종 국내 정치의 하부변수로 취급했다. 이 분야의 자리는 그 전문성 여부를 떠나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당파적 지식인들에게 배분하고, 그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박근혜 정부 말기 민의를 철저히 무시한 조급한 일본과의 합의, 문재인 정부 시기 죽창가로 잘 알려진 대일 인식, 그리고 국제정치 현실과 동떨어진 자기 승리의 확신으로 이어진 과정에 대한 역사적 책임과 고통스러운 성찰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두 번째는 일본의 전략적 시야의 변화이다. 과거 일본의 주요 위협은 북방으로부터 왔고, 한반도는 일본을 향한 단검과 같은 존재였다. 따라서 역대 일본 정부는 한국과의 관계를 중시했다. 그리고 미국의 맹방이자 대륙 세력의 팽창을 억제하기 위한 동반자라는 인식이었다. 그러나 이제 일본의 전략적 시야는 한반도를 넘어 인도·태평양으로 향하고 있다. 중국의 부상과 더불어 일본에 대한 주 위협은 한반도가 아니라 인도·태평양 전역에서 오고 있다. 한국의 전략적 위상은 전례 없이 약화되었다. 이는 2021년 11월 미국에서 개최된 한·미·일 외교 차관급 회의에서 일본이 미국의 면전에서 한·미·일 공동 기자회견을 거부한 데서 잘 읽힌다.

세 번째는 일본의 지역적 리더십 부재이다. 외교에서 일방적 승리는 대체로 추구할 목표가 아니다. 그 국가가 존재하는 한 역사적 경험과 기억은 계속될 것이고, 그 대가는 반드시 치르기 때문이다. 일본은 한·일관계에서 완벽한 승리를 추구했고, 이를 관철시켰다. 문재인 정부 시기 섣부르게 죽창가를 외쳤지만, 정권 후기에는 일본과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을 나름 했다. 윤석열 정부에서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대통령의 공약으로 내걸고 그 노력을 배가시켰다. 그러나 일본은 단호했다. 양보나 체면치레를 위한 공간을 일절 허용하지 않았고, 완벽하고 일방적인 승리를 추구했다. 성공했다. 이 승리가 과연 한·일관계나 역내 일본의 리더십에 도움이 될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오히려 역사적 부담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네 번째는 당면한 국제정세에서 한국이 처한 상황에 대한 위기의식이 그만큼 높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국제관계 구조의 변화와 한국 외교안보의 무능이 결합한 결과이다. 북한의 핵무장과 미·중 전략경쟁의 확대는 전례 없는 위기의식을 가져왔다. 미국의 IRA나 반도체법에서 드러난 최근 움직임을 보면 동맹을 배려할 여지는 거의 없어 보인다. 자국의 이익 보호에 급급하다. 일본은 이미 중국에 대응하기 위한 미국의 전략적 동반자로 확고히 자리매김했지만, 한국에서는 이러한 미국의 전략 구상에서 배제될 수도 있다는 위기 위식이 팽배하다.

구한말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한국전쟁 직전 단행한 에치슨라인의 망령이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새로이 형성되는 미국 중심의 공급망 네트워크에서 한국이 배제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일본은 이 구상에서 한국을 배제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대한민국의 미래에는 북한의 핵공격보다 새로운 국제 공급망 형성에서 소외되는 상황이 더 큰 위협이 되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역사적 책임과 국내 정치의 부담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희망하는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조치를 단행했다. 현 국제정치 상황을 미국이 제시한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의 대결이라는 신냉전의 시야로 해석한다면 같은 민주주의 진영인 일본과의 관계 개선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인식이다.

마지막으로 이 조치의 수습은 간단치 않다. 강대국의 압박에 일방적으로 굴복한 선례는 한국 외교에 두고두고 부담으로 남을 것이다. 추후 중국은 이 구도를 차용할 것이다. 한·중관계는 윤 정부에 최대의 도전이 될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 이후 중국과의 관계 모색을 위한 노력은 배가되겠지만, 현재 윤 정부의 주류 국제정세 인식과 역량이 중국과의 관계를 감당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3·6 조치의 결말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윤 대통령은 3월에 실로 오랜만인 대한민국 대통령의 일본 방문, 4월 미국 국빈 방문을 진행한다. 역사상 최대의 치욕적인 조치를 단행한 이후 어떠한 성과를 가져올지 주목된다. 이 “미래에 대한 엄청난 투자”를 국가적 실리와 역사적 책임에 대한 진지한 고뇌 없이 상대의 자비에 대한민국의 운명을 맡기고 단행한 것인지, 아니면 이에 대한 합당한 보상과 실리를 안고 돌아올지에 따라 이 조치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책임 여부는 달라질 것이다.


Today`s HOT
올림픽 성화 도착에 환호하는 군중들 러시아 전승절 열병식 이스라엘공관 앞 친팔시위 축하하는 북마케도니아 우파 야당 지지자들
파리 올림픽 보라색 트랙 첫 선! 영양실조에 걸리는 아이티 아이들
폭격 맞은 라파 골란고원에서 훈련하는 이스라엘 예비군들
바다사자가 점령한 샌프란만 브라질 홍수, 대피하는 주민들 토네이도로 파손된 페덱스 시설 디엔비엔푸 전투 70주년 기념식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