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 교육평론가·전 민주연구원 부원장

마르크스주의는 혁명론이나 경제이론으로서는 힘을 잃었지만, 사회를 바라보는 기본적 시각으로서는 유용함을 잃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곱씹어볼만한 마르크스의 관점은 ‘인간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인간의 본질이나 본성을 통해 사회현상을 설명하거나 판단하려는 시도를 해체하고 전복한다. 예를 들어 여성의 본성이 3K(아이, 부엌, 교회)에 적합하므로 기능을 이에 고정시켜야 한다고 규정한 나치라든가, 신이 부여한 불변의 본성(nature)을 전제하고 동성애가 이를 거스른다는 이유로 혐오하는 보수적 기독교에 대한 경종이다.

이범 교육평론가·전 민주연구원 부원장

이범 교육평론가·전 민주연구원 부원장

그도 그럴 것이, 현생 인류는 7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원시생활을 하던 시절과 사실상 동일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음에도 살아가는 방식이 엄청나게 달라졌다. 남한과 북한은 유전자뿐 아니라 문화도 공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과 몇십 년 사이에 크게 다른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다. 인류의 잠재적 유연성이 얼마나 폭넓은지를 보여줌과 아울러, ‘참된 인간성’이나 ‘고유의 민족성’ 등을 상정하는 본질주의적 접근의 한계를 잘 드러낸다.

두 번째로 들여다볼 만한 마르크스의 관점은 ‘자본가를 의인화된 자본으로 간주한다’(<자본론>)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속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구조’라는 것이 존재하며, 그러하기에 이를테면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를 자본가의 탐욕에서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최근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이른바 ‘특권 중산층’의 탐욕으로 인해 교육경쟁이 촉발·심화되었다는 담론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특권 중산층에 대한 적개심을 키우고 이들과 싸우는 것이 우선 과제라는 그릇된 실천적 결론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돌이켜보면 학벌사회의 폐해를 강조하며 그 결론으로 서울대 폐지를 내세운 사람들이 있었다. 전형적으로 구조에 대한 인식이 결여된 주장이다. 학벌이라는 것이 나타난 근본 원인은 대학의 서열화이고, 서열화의 핵심은 ‘교육의 질’의 차이이며, 교육의 질이 다른 가장 중요한 원인은 재정 투입의 격차에 있다. 이 구조를 그대로 둔 채로 서울대를 없애면 연세대와 고려대가 서울대의 역할을 대신하게 될 뿐이다. 허망하지 않은가? 과열된 교육경쟁의 원인이 이른바 ‘적폐’라는, 즉 특정 집단의 욕망이나 특정 대학의 존재 때문이라는 주장은 경쟁을 신비화하고 경쟁의 원인에 대한 구조적 분석을 가로막는다.

능력주의 비판론도 비슷한 위험을 안고 있다. 능력주의를 조세·복지를 반대하고 불평등을 당연시하는 ‘정당화 이데올로기’라고 이해한다면 이를 경계하는 것은 타당하다. 하지만 능력주의를 ‘조직의 구성원리’라고 이해한다면 이는 불가피하며 심지어 긍정적이다. 국민 세금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려면 능력있는 공무원이 필요하며, 시장경쟁 상황에 놓여있는 민간기업은 능력있는 신입사원을 요구한다. 능력주의는 ‘구조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접근은 특히 정책 설계자에게 유용하다. 민주주의의 속성상, 사람들의 욕망이나 태도를 나무라는 식의 접근은 위험하다. 유권자의 반감을 불러일으켜 선거에서 표를 잃게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제도를 변경하여 변화를 꾀하자는 설득전략이 현명하다. 예를 들어 출생률을 높이기 위해 청년들을 책망하기보다 철저하게 제도 개선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얼마 전 조정훈 의원이 최저임금이 적용되지 않는 육아 도우미를 외국에서 받아들이자고 제안한 바 있다. 나는 이런 아이디어가 나름 의미가 있으며 전면 도입은 어렵더라도 일부 지역에서 시험적으로 실시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조 의원은 이 법안을 홍보하는 글에서 “천문학적 예산과 함께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제도와 지원 정책이 쏟아져 나왔다. 다 소용없었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을 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만 찾아봐도 이것은 틀렸다.

아동수당, 보육지원, 육아휴직 등 직접적인 저출생 대응예산이라고 할 수 있는 ‘가족지원 예산’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보자. 한국은 1.37%로 OECD 평균(2.11%)에 한참 뒤처진다(2019년 기준). 평균치로만 끌어올려도 차액이 출생아 1명당 5000만원 이상 돌아가는 액수다.

마침 헝가리에서 현금성 지원을 통해 출생률을 끌어올린 것이 화제가 되고 있다. 영어의 ‘materialism’은 철학 용어로는 유물론이라고 번역하지만 일상 용어로는 물질주의라고 번역한다. 재앙적인 출생률에 대응하기 위해 보다 즐거운 ‘유물론’적인 태도로 거리낌없는 ‘물질주의’를 시행하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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