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죄와 화해

[송두율 칼럼] 사죄와 화해

2010년부터 시행된 일본의 고교 무상화 정책에서 유일하게 배제된 조선 고급학교가 2013년에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 긴 법정투쟁을 기록해 일본사회에서 일어나는 재일동포의 차별문제를 고발한 다큐멘터리 영화 <차별>이 있다. 지난 3월22일 국내에서 개봉했고, 4월 말부터는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뮌헨, 암스테르담에 이어 다른 유럽 주요 도시에서도 순회 상영되고 있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내가 사는 포르투갈에서는 이 영화를 볼 수 없어 영화의 시놉시스와 주요 영상의 편집을 보았다. 북한과 ‘총련’을 연관 지어 교육을 받을 인간의 보편적인 기본권을 제약하는 일본 정부의 행동양식은 과거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이 영화의 상영을 지원하는 한 인사가 주독 일본 영사관에서 암암리에 이의 상영을 여러 가지로 견제하기 시작한다고 알려왔다. 이미 독일 여러 도시에서 ‘평화의 소녀상’을 철거시키는 외교적인 압력을 해당 독일 기관에 공공연하게 행사했던 일본 정부인지라 특별한 소식은 아닐 수도 있다.

영화 상영 후에 진행된 토론에서도 일본 영사관 측에서 보낸 것으로 여겨진 일본인과 독일인은 일본이 교육의 기회균등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훼손한 것이 아니라 일본인을 납치했던 북조선을 추종하고 일본사회에 동화하지 않는 그들이 문제라는 식으로 토론의 논지를 폈다는 것이다. 그 인사는 또 유럽 주요 도시에 주로 유학 목적으로 체류하는 젊은 세대의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은 실망스러울 정도라고 말했다. 20~30대가 특히 경제적 이해를 증진한다는 점에서 최근의 한·일관계를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세대라는, 국내 현실의 반영이다.

그럼에도 과거사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지향적으로 나가야 한다는 의견보다는 일본이 먼저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사죄와 반성을 바람직한 한·일관계의 방향이라고 여기는 분위기는 여전히 강하다.

한·일관계의 정상화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외국의 사례로 전후 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독일과 폴란드 사이의 관계가 자주 거론된다. 윤석열 대통령도 얼마 전 독일과 프랑스가 양차 세계대전을 통해 수많은 인명을 희생했지만, 지금은 유럽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고 강조하면서 한·일관계도 이처럼 과거를 넘어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당위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먼저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와 한국과 일본 간의 관계를 등치시킬 수 있는 전제가 바로 서 있어야 한다. 올해 1월22일, 전후 독일과 프랑스 간의 관계 정상화의 초석을 놓은, 서독의 아데나워 총리와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이 서명한 ‘엘리제 조약’이 60주년을 맞았다.

당시 프랑스는 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국의 성원이었지만 서독은 분단된 패전국의 한 부분이었고 두 국가 사이에는 전쟁이 남긴 감정의 골도 상당히 깊었을 때였다. 드골이 아데나워에게 화해의 손을 먼저 내밀 수 있었던 것은 승자가 보여 줄 수 있는 아량이기도 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동기는 전후 서유럽이 미국과 미국의 ‘트로이의 목마’인 영국에 철저히 종속되는 것을 막기 위한 전략의 한 고리로 서독을 먼저 끌어안았다.

그러나 서독이 이런 전략에 끌려다니는 것을 우려한 미국과 영국, 그리고 서독의 유보적인 태도 때문에 조약체결 직후에도 프랑스와 서독 간의 불협화음이 있었고 조약이 비준되자마자 무효가 됐다는 평가까지 있었다. 아데나워가 두 나라의 관계를 가시가 있지만 계속 봉오리를 맺고 꽃을 피우는 장미에 비유한 것처럼, 과거의 숙적은 애증의 부침을 겪으면서 유럽통합의 중심이 되었다.

독·불, 애증 부침 속에 관계 발전

독일과 프랑스의 이 같은 관계발전을 한·일관계 정상화의 모범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러나 두 나라가 지녔던 전제조건들이 한·일관계의 그것과는 사뭇 결이 다르다. 먼저 프랑스와 독일은 각각 자기의 과거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하면서 서로 만났다. 적법성의 문제가 제기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지만, 프랑스는 나치독일과 협력했던 비시정부 시기(1940~1944)의 이른바 ‘조력자’를 우선 처벌했는데 1만명 정도가 사형, 10만명 정도가 범죄 행위의 경중에 따른 처벌을 받았다. 일제 식민지 지배체제에 적극 협력했던 반민족행위자들이 해방 후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 우리 스스로 자문하게 하는 대목이다.

미진한 일본의 ‘과거의 극복’ 논의와 비교해서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독일의 ‘과거 청산’은 그러면 어떤 모습이었는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으로 시작된 독일(서독)의 ‘탈나치화’는 기본적으로 점령국 미국의 유럽 전후 질서의 정립이라는 틀 안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나치에 적극 가담했던 1만3000명가량의 인물에 대한 재판과 처벌이 있었지만, 프랑스 자신이 자국의 나치 조력자를 숙청한 것에 비하면 오히려 미미했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아이히만 재판과 함께 홀로코스트의 진실이 밝혀졌고, 전후 보수정치의 근간을 흔들었던 ‘68혁명’은 사회 전반에 걸쳐 과거 청산에 대한 새로운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를 압축적으로 보여준 것이 1985년 5월8일, 종전 40주년을 기념해 당시 서독 대통령 바이체커가 연방의회에서 행한 연설이었다. 이날이 전쟁의 패배를 기억하는 날이 아니라 나치의 반인륜적인 폭압에서 ‘해방된 날’임을 강조하면서 독일 국민의 집단적인 범죄는 아니지만, 이 무거운 유산을 받아들이고 더 낳은 미래를 위해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그는 강조했다. 바로 이 점에서 독일과 일본이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는 태도는 물론, 이에 따른 과거의 극복이나 청산 문제를 대하는 데 적잖은 차이가 드러난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점령국이었던 미국의 책임이 크다. 히틀러를 중심으로 한 나치즘의 핵심적인 권력구조를 해체했던 미국은 일본에서는 점령통치의 수단으로서, 또 극동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 일본 군국주의의 핵심인 일왕제의 해체를 보류했다.

화해의 관건은 사죄의 진정성

태평양 전쟁을 총지휘했던 도조 히데키를 포함한 14명의 A급 전범의 영령이 봉안된 야스쿠니 신사에 총리와 각료가 참배하거나 공물을 봉납하는 일이 최근 기시다 정부에서도 지속하고 있기 때문에 주변국의 강한 비판도 이어지고 있다. 종전이 군국주의에서 일본이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왕을 위한 성전과 이의 패전을 슬픔과 아쉬움 속에서 기억하는 날이 되었다.

1970년 12월7일, 춥고 음산한 겨울날에 바르샤바의 유대인 게토 위령비 앞에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비에 젖은 채 찬 바닥에 무릎을 꿇고 나치 독일이 행한 범죄행위에 사죄하는 장면은 이와는 다른 기억 정치의 모습을 보였다. 당시 이러한 사죄의 표현 형식이 지나쳤다는 독일 내의 비판도 많았고, 또 사죄에 뒤따르는 구체적인 배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폴란드 측의 불만도 컸다. 하지만 말로써 다 표현될 수 없는, 브란트가 보여준 사죄의 진정성은 두 나라 사이의 화해뿐만 아니라 후에 냉전의 장벽을 허무는 ‘동방정책’의 결실을 위한 큰 자산이 되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라는 ‘주기도문’의 고백이 종교적인 의미에서만 아니라 정치적인 과제의 해결에도 큰 의미가 있다고 일찍이 한나 아렌트는 주장했다. 브란트도 폴란드와 화해를 추동했던 자신의 동기가 바로 이 기독교적인 의미의 사죄였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동아시아의 문화적인 맥락에서는 절대자인 신을 전제하지 않고도 인간과 사회의 관계체계를 순환시키는 기본을 공자는 ‘서(恕)’라고 표현했다. 글자 그대로 서로 같은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한다’는 해결 불가능성까지도 전제하는 근본주의적인 접근보다 훨씬 현실주의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 일본이 이미 수차례에 걸쳐 사죄했으니 우리도 이제는 미래를 향해 과거를 함께 넘자고 이야기하지만 그러한 사죄의 진정성을 많은 국민이 아직도 느끼지도, 또 믿지도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경제협력과 미·중 갈등, 그리고 북핵문제만을 앞세운 현실주의적인 논거만으로 많은 국민의 마음이 한·일 간의 진정한 화해의 방향으로 생각처럼 그렇게 쉽게 움직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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