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땀·눈물 어린 쌈짓돈

남경아 <50플러스 세대> 저자

아버지가 봉투 하나를 쓱 내밀었다. 오랜만에 아버지 집에서 점심을 먹고 막 나오려던 차였다. “너무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빳빳한 돈뭉치였다. 20년 전 아버지가 사업한다고 목돈을 빌려 간 적이 있는데, 사업이 망하면서 다 갚지 못하고 일부가 남아 있었다. 전후 사정상 이 돈을 되돌려 받는 건 어려웠기에 이미 잊은 지 오래다. 이걸 지금 주신다는 거다.

남경아 <50플러스 세대> 저자

남경아 <50플러스 세대> 저자

아버지의 노년은 꽤 오랫동안 고달팠다. 아버지도 젊은 시절엔 대기업의 잘나가던 샐러리맨이었다. 하지만 살벌한 대기업의 경쟁 속에서 지방대 출신 아버지의 효용가치는 딱 만년 과장까지였다. 사십 중반에 지방으로 전보 발령받은 뒤 몇년 버티다 결국 오십이 되기 전, 갑자기 명예퇴직을 하게 됐다. 마땅한 대책도 없었기에 떠밀려 시작한 자영업이 화근이었다. 또박또박 안정적 월급으로만 사셨던 분이 아무리 작은 가게라도 경영을 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쉽지 않았으리라. 평생 모아둔 돈을 야금야금 까먹다가 결국 부도가 났고 이후 오랫동안 아버지는 피·땀·눈물,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코로나19 전까지도 아버지는 소일거리를 놓지 않았고 자식들이 주는 용돈과 생활비를 아끼고 아껴 소소한 빚들을 다 갚고 마지막으로 자식들에게 남은 마음의 빚까지 정리하신 거다.

그나마 아버지의 노년에 햇살이 비추기 시작한 건 경로당 총무를 맡게 된 후부터다. 말수는 적지만, 성실하고 꼼꼼했던 아버지는 경로당 총무로 꽤 신뢰를 받았다. 각종 보조금과 후원금을 모아 경로당 목돈을 마련하고, 월 1회 특별식을 준비할 때면 이가 안 좋은 노인들을 위해 별도의 식사를 준비할 정도로 살뜰하게 주변을 챙겼다. 혼자 움직이지 못하는 노인들의 경로당 출퇴근을 도우며 그 자식들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를 받는 걸 최대의 기쁨과 보람으로 느끼셨다. 코로나19로 경로당이 문을 닫았을 때도 아버지는 환기와 화분 물 주기, 청소를 빠짐없이 하셨다. 혼자 사는 아버지에게는 가끔씩 찾아오는 자식들보다 이웃 노인들이 더 큰 활력소였다.

오십에 접어들면서 나는 아버지가 얼마나 일찍 퇴직하신 건지 실감이 났다. 오랫동안 중·장년 일을 해 왔지만, 부모 세대의 노후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다. 생각해 보면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모두 섭렵하고, 세상을 바꾸어 본 경험도 있는 우리 세대는 거침이 없었다. 우리가 내딛는 걸음이 곧 새로운 길이었다. 자녀를 양육할 즈음에는 공동육아, 대안학교, 홈스쿨링 등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고, 이제 우리가 노년기에 접어들 때가 되니 새로운 중·장년 정책도 만들고 전용 공간도 확보하고 더 질 높은 노년을 위해 주거, 의료 등 모든 분야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나의 노후를 위해서는 이렇게 애를 쓰면서도 정작 부모 세대의 아픔에 대해서는 너무 늦게 목소리를 낸 것 같아 반성하게 되었다. 의료기술 발달로 수명은 늘었지만 아픈 채로 오래 고달프게 살고 있는 고령의 부모들을 볼 때마다 찡하다.

세대 간 정책은 분절적일지라도, 모든 세대는 서로 이어지며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 상대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고, 많은 자산을 가지고 있는 우리 세대가 모두를 아우르는 세대 연결자로서 역할을 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쌈짓돈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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