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가 느꼈던 문재인 정부의 통계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전문적인 학자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던 박사과정 시절을 관통하는 열쇳말은 ‘주장과 증거’였다. “너의 주장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하라. 주장이 없으면 말하지 말아라. 타인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할 뿐이다. 주장은 반드시 증거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증거가 분명치 않은 주장은 가짜다.” 지도교수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이다.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시하려면 통계 활용은 기본이다. 잘 만들어진 통계자료는 한국 사회에 대한 수많은 진실을 담고 있다.

하지만 통계자료를 잘 만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산 부족, 역량 부족, 의사결정권자의 부적절한 요구에 가로막힐 수 있다. 제대로 된 연구자라면 간단한 분석 몇 가지만 해도 자료를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 금방 감이 온다. 자료를 믿을 수 없다는 판단이 들면 신뢰할 수 있는 다른 자료를 구하든지, 어쩔 수 없이 그 자료를 써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최소한의 약한 주장만 제시하고 자료와 주장의 한계를 밝히는 것이 연구자의 도리이다.

문재인 정부가 집값·소득·고용 등 주요 국가통계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나 같은 연구자는 그 의혹이 사실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알 도리가 없다. 감사원이나 검찰의 몫일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통계를 다뤄온 연구자가 느꼈던 의문들을 독자와 공유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소득주도성장론이 처음 등장했을 때 약간은 어리둥절했다. 국제학계에서는 임금주도성장이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소득주도성장이라는 말은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 자영업이 두 번째로 큰 한국 특성상 임금이 아닌 소득이라고 해야 한단다. 그렇다 치자. 학계는 치열한 곳이다. 누군가가 주장을 내놓는 순간 전 세계 학자들의 검증을 견뎌야 하고, 그러지 못하면 2류, 3류 학자로 도태된다. 소득주도성장은 학계에선 주변적인 설이었다. 소득주도성장을 주장하는 소수 학자들의 논문을 찾아보니 대기업의 낙수효과는 사라졌기에 소득주도성장으로 돌아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제시한 통계를 보면 낙수효과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예전에 비해 절반 정도로 줄었지만 여전히 중요한 성장의 원천 중 하나였다. “이 통계를 왜 이렇게 해석하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부동산으로 눈길을 돌리면 가히 ‘엉터리 통계’의 각축장이었다. 이제는 전설이 된 김현미 당시 국토교통부 장관의 “문재인 정부 들어 집값은 11%만 올랐다”는 국회 답변을 보자. 청와대나 국토부의 압박에 의한 적극적인 통계조작이 없었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당시 서울 집값이 두 배가 되었다는 사실은 전 국민이 다 알고 있는 상식이었다. 장관은 지시한 적도 없었고, 알지도 못했고, 아랫사람들이 엉터리 통계를 만들어 장관의 ‘심기 경호’를 했다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지적인 능력을 갖췄다면 이건 이상하다고 느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주요 의사결정권자들은 상식과 동떨어진 이상한 통계에 눈감았다. 내 지도교수 말씀에 따르면 “증거가 분명치 않은 주장은 가짜다”.

문재인 정부 출범 시점에서 한국의 소득 대비 부동산 가격은 OECD 국가들 중에서 낮은 편에 속했다(OECD 통계). 서울 집값만 따로 떼어 주요 글로벌 도시들과 비교해도 중간 정도였다(이코노미스트 통계). 이게 맞다면 굳이 집값 끌어내리겠다고 그 난리를 피울 이유가 없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국민 상식과는 잘 맞지 않는 통계이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상식이 일정 부분 과장돼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통계가 잘못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디서 잘못됐는지 밝히고 제대로 된 통계를 얻은 후 그에 근거해 정책을 펼치는 게 정부가 할 일이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 내내 아무도 국제 통계를 언급하지 않았다. 대선을 코앞에 두고 부동산 때문에 불리해질 상황이 되자 슬그머니 국제 통계를 들이밀며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는 그리 많이 오른 편이 아니라고 변명했다. 달면 인용하고, 쓰면 눈감는 통계의 선별적 이용이다.

조작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나로선 알 수 없다. 하지만 엉터리 통계에 근거한 가짜 주장이 정책이란 이름으로 활개를 쳤던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통계학은 ‘국가학’이다. 국가의 상태를 측정해 통계로 만들어야 통치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통계학의 영어 표기인 ‘statistics’가 ‘국가’를 뜻하는 ‘state’로 시작하는 이유다. 보수·진보를 떠나 어떤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국가의 기초를 뒤흔들 수 없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Today`s HOT
올림픽 성화 도착에 환호하는 군중들 러시아 전승절 열병식 이스라엘공관 앞 친팔시위 축하하는 북마케도니아 우파 야당 지지자들
파리 올림픽 보라색 트랙 첫 선! 영양실조에 걸리는 아이티 아이들
폭격 맞은 라파 골란고원에서 훈련하는 이스라엘 예비군들
바다사자가 점령한 샌프란만 브라질 홍수, 대피하는 주민들 토네이도로 파손된 페덱스 시설 디엔비엔푸 전투 70주년 기념식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