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 방치한 국가의 책임과 재정건전성

안호기 사회경제연구원장

‘계층 간 갈등을 심화시켜 심각한 사회문제로 번질 수 있다.’ 양극화나 불평등에 관한 경제 기사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다. 최근 사회불만 범죄가 끊이지 않는 걸 보면 경제면에서 접했던 내용이 현실화하고 있다. 성남 서현역과 서울 신림동 흉기난동뿐 아니라 며칠 전에는 7층 건물 옥상에서 아래로 벽돌과 나무토막을 던지는 사건도 발생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사회에 대한 불만이 쌓여 범행을 저질렀다는 공통점이 있다.

2021년 선진국 그룹에 편입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설립 이래 57년간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변경된 사례는 한국이 처음이었다. 한국이 선진국 반열에 오른 그해 미국 여론조사업체 퓨 리서치센터가 17개 선진국 성인 1만9000명을 상대로 ‘무엇이 인생을 의미 있게 하는가’를 조사했다. 한국은 ‘물질적 풍요’를 1순위로 꼽았고, 2위는 ‘건강’, 3위는 ‘가족’이었다. ‘가족’이 1순위였던 14개국 사람들과는 달랐다. ‘건강’(스페인)과 ‘사회’(대만)를 꼽은 나라도 있었다. 매경이코노미가 지난해 13~18세 청소년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물었다. ‘돈(물질적 풍요)’이라고 답한 청소년이 30.1%(복수응답 기준)로 가장 많았다.

조사 결과만 보면 한국 사회가 돈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물질만능주의에 젖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과거 ‘지도층’이라고 불렸던 이들일수록 돈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다. 국회의원이나 고위공직 후보자의 재산 내역을 보면 대부분 ‘투기’에 가까운 ‘투자’로 부를 불렸다. 세금을 덜 내기 위해 온갖 치졸한 편법을 동원한 사례도 흔하다. 지도층이 아니라 ‘천박한 졸부’일 뿐이다. 문명 이전 사회에서 지위를 얻는 방법은 물건을 포기하는 것이었으나, 지금은 반대가 됐다.

삶의 질은 따지지 않은 채 급속한 경제성장에 매달린 결과인 것 같아 부끄럽다. 인구가 5000만명을 넘고,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를 넘어서는 등 규모는 커졌지만 삶의 질 지표는 바닥권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됐음에도 지난해 산업재해 사망자는 2223명으로 전년보다 7%가량 늘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국 중 중남미 3개국을 제외하고는 노동시간이 가장 길다. 자살률은 최고 수준이고, 행복도는 바닥권이다.

6·25전쟁 직후 한국은 아프리카 국가들보다 더 가난한 나라였다.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고, 실제 그렇게 자수성가한 부자도 있었다. 하지만 경제성장에 속도가 붙으면서 빈부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부는 대물림돼 불평등이 고착화하고 있다. 부에 따라 서열을 매기는 사실상 계급사회가 됐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상대적 박탈감이 확산됐다.

통계청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를 보면 지난해 소득 5분위(상위 20%) 가구의 순자산은 10억273만원으로 1분위(하위 20%) 가구(1억5472만원)에 비해 6.5배 많았다. 2006년 4.5배였던 것에 견주면 격차가 확대됐다. 자본주의의 특징이기는 하지만 부자일수록 부를 늘릴 가능성이 큰 사회가 됐다.

경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해진 사회는 갈등이 심해질 수밖에 없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발간한 ‘유럽 공중보건 저널’은 33개국의 불평등과 강력범죄 사이의 연관성을 조사한 결과, 불평등은 사회적 신뢰를 무너뜨리고 살인·폭력 등 범죄를 유발한다고 밝혔다. 반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격차가 작은 사회는 건강 수준이 높고, 폭력도 적게 발생한다.

한국 사회는 ‘불만’ ‘분노’ ‘적대감’ 따위의 격한 감정이 갈수록 고조되고 있다. 격한 감정을 누그러뜨리거나 해소할 방법이 없으니 사회불만 범죄로 표출되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처벌을 강화하면 범죄를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범죄의 원인을 찾아내고, 근본적인 예방책을 세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

불평등을 해소해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는 게 시급하다. 공정한 경쟁 시스템을 만들고, 경쟁에서 탈락하더라도 다시 도전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줘야 한다. 국가는 어떤 경우에도 시민의 기본 생존권을 보장해야 한다. 사회안전망을 제대로 갖춰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의 공공사회지출은 2022년 말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14.8%로 OECD 국가 평균보다 6.3%포인트 낮았다. 정부가 내년 보건·복지·고용 예산을 올해보다 7.5% 늘리기로 한 것은 환영하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재정건전성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게 있다. 불평등 해소를 위한 장기적 안목의 정책이다.

안호기 사회경제연구원장

안호기 사회경제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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